감상글(시)

어느 토요일 오후 마포 생맥주집에서 나해철 시인과 함께 들은 이야기 / 이시영

톰소여와허크 2017. 5. 19. 22:11



어느 토요일 오후 마포 생맥주집에서 나해철 시인과 함께 들은 이야기 / 이시영

  서중 복도사건 이후 공부를 놓아버린 조태일 소년의 성적은 고3 졸업 무렵에는 급기야 반에서 58등까지 내려가 있었다는데요. 그 성적엔 어느 곳도 원서를 써줄 수 없다고 완강히 버티던 담임 선생님을 사흘을 찾아가 설득한 끝에 “59등에겐 절대로 이야기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 뒤 가까스로 K대 국문과 원서를 쓸 수 있었답니다. 그러나 조태일이 원서를 써갔다는 소문이 학교 안팎에 안 날 리가 없는 법. 이번에는 59등이 담임을 찾아가 강짜를 부렸다고 합니다. “아니 58등은 써주고 59등은 안 써준다니 말이 됩니까?” 결국 59등도 J대 철학과 원서를 써가 그해 입시에서 나란히 합격했으니 어찌 좋은 일 아니었겠느냐며 조태일 시인은 마치 아미타불처럼 빙그레 웃으며 말하는 것이었어요.

- 『바다 호수』, 문학동네, 2004.



  * 성적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제 발 제가 찍는다고 고등학교 가서 처음 받은 성적을 공개하면 60명 넘던 반 친구 중에 37등으로 기억한다. 그냥저냥 고2로 올라갔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10등 안에 턱걸이하면서 노력상이란 걸 받은 적이 있었다.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크게 격려 받고 의욕이 불타기도 했을 테지만, 다음 시험에 원래 자리 근처로 추락함으로써 노력상이 노력의 결과가 아님을 증명하고 말았다. 진즉에 포기한 수학도 한몫 거들었을 것이다. 고3 때는 사범대 원서가 어렵다는 담임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그만 오기가 생겨서 무조건 원서를 내달라고 졸랐으니 소년 조태일과 닮은 점이 있었나 싶다. 
낮술 먹으며 나누는 이야기란 게 대개 이런 식일 것이다. 시국에 대한 팽팽한 의견 충돌, 밥벌이에 대한 애로, 주변 친구들의 동정 파악 등등으로 술병이 제법 쌓이면 지난 한때를 과장한 개인의 무용담도 낯설지 않다. 낮술이란 게 일이 없거나 일을 잠시 미뤄도 좋은 상태에서 마시는 것이니 평소보다 주의가 느슨해지고 그런 만큼 더 부산하고 호기로워지기 쉽다. 자칫, 중구난방 식으로 떠들썩하다가 사람이 술을 먹지 않고 술이 술을 먹는 풍경까지 이르기도 하지만 그 중에도 분명 들을 만한 맹물들의 이야기가 번뜩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별반 요긴하지 않은 시답잖은 이야기도 그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이 누군냐에 따라서 또 어떻게 포장해서 들려주고 받아 적느냐에 따라서 아주 그럴듯한 얘깃거리가 되고 썩 괜찮은 작품이 되기도 하는데 위 시도 그렇게 보인다. 잘 나가는 모범생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잘 나가는 58등 59등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흥미롭다. 게다가 58등 59등이 1등 부럽지 않게 자기 소신을 밀고나가 유의미한 성취를 내고 각자 인생의 주인공으로 자리 잡아 있는 모습이 왠지 든든하고 고맙다. 말하는 이도 듣는 이도 “어찌 좋은 일 아니었겠느냐”며 흔쾌히 공감하고픈 장면이다. 
이런 유쾌한 일들이 낮술의 술안주가 아니라 현실로 오기를, 58등 59등과 함께 기다려봐야겠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