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치페이 / 김정원
더치페이 / 김정원
땅딸막하고 다부지게 생긴 할머니가 늙은 호박을 이고 상경했다. 반포 버스터미널에서 택시를 잡아탄 할머니에게 운전사가 “어서 오십시오. 어디로 모실까요?”하고 여쭈었다. 할머니는 대답 대신 쪽지를 내밀었다. 봉천동 달동네 딸 집까지 요금 2만 원. 택시가 딸 집 가까운 곳에 정차했다. 눈치 빠른 할머니는 쥐고 있던 꼬깃꼬깃한 만 원짜리 지폐를 운전사에게 얼른 던져주고는 태연히 택시 뒤에 섰다. 운전사가 트렁크를 열면서 만 원이 모자란디…… 말꼬리를 흐리자, 당찬 할머니가 서슴없이 말했다. “기사 양반도 항꾼에* 타고 왔응께 절반은 내야 경우에 맞지라우, 앙 그려?” 운전사는 언덕길을 올라 현관 안까지 함박보다 큰 누런 호박을 날라주고서도 할머니의 큰딸에게 만 원을 더 달라고 차마 입을 떼지 못했다
*함께
-『국수는 내가 살게』, 삶창, 2016.
* 이야기가 있는 시 한 편이다. 이야기가 이야기로 그치지 않고 여운을 주게끔 똑같은 이야기도 그럴싸하게 쥐어짜야 읽는 묘미가 생긴다. 이 시도 하고많은 더치페이 이야기 중에서도 유난한 더치페이다.
“저 짝으로 쪼간 돌아서”(이대흠, ‘아름다운 위반’ 중) 가자며 버스를 택시처럼 부린 시골 할머니에 맞먹는 분이 등장했다. 두 분 할머니 모두 상식 밖의 요구를 한다. 저 번 할머니가 무릎이 애리다(아리다 혹은 여리다의 방언)는 핑계로 버스 노선을 이탈시키도록 했다면 , 이번 할머니는 어처구니없는 논리로 요금 절반을 후려치는 내공을 보여준다.
두 할머니의 성공에 박수를 보내고 싶은 독자가 있다면, 필시 버스기사와 택시기사의 선한 마음에 대한 감사의 뜻이 담겨 있을 것이다. 이런 선한 마음이 개인의 고유한 성정이기도 하겠지만 두 분 기사의 마음에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각박한 삶이 이런 인정이나 주위를 돌아볼 여유를 앗아가는 것도 사실이다. 시인의 다른 시에서 보듯 “징계해고 정리해고 희망퇴직 저성과해고 / 네 개의 날이 시퍼렇게 선 비수를 항상 턱 밑에 바투 대고 있는, / 깡마른 노동자들에게만 희생을 강요”(‘돼지우리에 갇힌 우리’ 중)하는 현실에서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삶에 불친절해지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이다.
더치페이는 자기 몫의 계산을 스스로 하는 거다. 김영란법이 아니더라도 남에게 부담을 전가시키거나 필요 이상의 부담을 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다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금전적으로 또 심적으로 여유 있는 자가 조금 더 손해 보고 살아야 평등한 더치페이 정신에 더 부합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은 해본다. 그러니 가난한 할머니가 만 원을 아낀 것도 흉이 아니다. 그렇다고 택시기사가 더 여유가 있는 사람은 아니었을 텐데 사람에 대한, 가난에 대한 이해가 만 원을 손해 보게 했다.
예의 버스기사 같고 택시기사 같은 마음의 여유가 공기처럼 확장되어 국수 정도는 내가 살게, 이런 말들을 매일 하고 매일 들었으면 좋겠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