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기’가 아니라 ‘비기’가 싫다는 말 / 김민정
‘보기’가 아니라 ‘비기’가 싫다는 말 / 김민정
자정 넘어 종로 <금강제화> 맞은편 가판에서 한 남자가 한 여자에게 인형을 골라주고 있다. 여자가 가리킨 건 제 키와 엇비슷한 특대 사이즈의 흰곰이다. 자기 없이 하루도 못 자니까 자기 없을 땐 밤마다 얘를 껴안고 잘래. 아줌마가 총채로 비닐에 싸인 흰곰을 탈탈 턴다. 여자는 양미간을 찌푸린 채 팔짱을 낀다. 아줌마가 마른걸레로 비닐에 싸인 흰곰을 싹싹 닦는다. 새 물건 없어요? 흰곰이 먼지 뒤집어써서 은곰 됐잖아요. 아줌마가 옆 가판으로 가 특대 사이즈의 흰곰을 하나 빌려서는 다 큰 아이를 업듯 등에 지고 온다. 그 신호등의 녹색 불이 깜빡거렸으므로, 그들에게는 사실 쏜살같이 달려가는 게 맞는 일이므로…… 야 이 씨발 연놈들아! 개쌍 연놈들아! 언젠가 태극기 파는 아줌마에게 함에 든 태극기 한번 꺼내봐달라고 했을 때 살 것처럼 흥정하고는 비싸다면 쌩까버렸을 때 이걸 그냥 확! 주먹 쥔 손으로 엿 먹이는 포즈를 나도 한 방 먹어본 적이 있어서 좀 아는데 치욕은 역사책만의 고유명사는 아닌 게 분명하고 여기까지 읽고도 누가 더 밉상인지 분간할 줄 모른다면 있지, 그게 나는 우리가 헤어진 이유라고 봐.
-『아름답고 쓸모없기를』, 문학동네, 2016.
* 곰 인형을 살 것처럼 하다가 안 사고 가는 사람과 그걸 참지 못하고 대놓고 욕하는 사람 중에 누가 더 밉상일까. 태극기를 살 것처럼 하다가 안 사고 가는 사람과 그걸 참지 못하고 대놓고 주먹감자를 먹이는 사람 중 누가 더 밉상일까. 장면 장면의 세세한 상황이나 인물 간 어투와 동작을 고려해야겠지만 주어진 상황만 따져보더라도 어느 쪽을 편들기가 쉬운 것만은 아니다.
앞의 인형을 고르는 두 남녀는 일단 밉상이다. 비닐에 든 인형 자체가 먼지를 타지는 않았을 테고 또 주문에 따라 옆 가게까지 가서 물건을 대어 오는 성의까지 감안한다면 두 남녀의 태도는 욕 듣기 딱 좋다. 그렇다고 해서 뒤에서 욕을 해대고 주먹질을 하는 게 옳으냐는 문제도 있다. 어떻게 보면 수치감과 모욕감을 서로 공평하게 나누어 가진 것도 같은데, 시인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다.
판단의 순간에 상대가 내린 결정을 보고, 아- 이 사람은 나랑 비슷하구나, 아- 이 사람은 나랑은 다르구나 하면서 상호 교류나 관계 맺음에 영향을 받기도 한다. 시인은 자기 생각을 다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독자 판단의 여지를 준다. 시인과 가까운 사람이라면 조금 긴장해야 할지 모른다. 생각이 다른 사람으로 간주되어 멀리 내쳐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물건 파는 사람이 그렇게 밉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자기 돈 자기 쓰는 데 그 정도 재고 따져볼 권리도 없겠느냐며 게다가 욕을 들을 만한 이유는 더욱 없다고 억울을 말하는 손님 입장을 존중하지만, 종일 거리에 나앉아 인형 두세 개나 잡화 몇몇을 팔아서 수지를 맞추는 사람 입장에서는 기분이 이만저만 상할 일이 아님을 더 이해하고픈 마음이다.
또 생각하자면, 판단이 명확하지 않을 때 처신이 유리할 데가 많다는 걸 경험으로 안다. 도저히 인정할 수도 묵과할 수도 없는 사실, 그런 게 아니라면 가까운 사람, 오래 같이 살 사람 편을 드는 것도 필요하다는 걸 실감하고 있다.
이렇게 적고 보니 의아하게 여겼던 시 제목에 대한 이해가 생긴다. ‘보기’ 싫은 건 그냥 싫은 거고 ‘비기’ 싫은 건 정말 싫은 것일 수도 있겠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사소한 데서 자기주장만 옳다고 말하는 경우가 종종 있고 그게 나 자신일 수도 있다. 그럴 때 누구로부터 “비기 싫어”, 이런 말을 듣기도 한 것 같다. 정말 밉상은 가까운 데 있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