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개구리밥 / 박성우

톰소여와허크 2017. 10. 9. 03:19

개구리밥 / 박성우



헛짚은 날들이 나를 증명해놓았네

개구리밥이 물 위에 뿌리를 내리듯

헛물켠 시간들이 나를 세월의 방죽 위에 뜨게 했네

발목 닿지 않을 것 같은 내일도 겹겹이 떠 있을 것이네

바둥거려도 집으로 가는 골목과 골목은 좁아만 갔네

짐 꾸려 떠나온 곳마다 헐거워진 세간 대신

방안 가득 채운 달이 목메였네

순대 한접시 털래털래 들고 퇴근하는 밤엔

시린 달이 차가운 방에 들어와 소주를 들이켰네

잠들지 못한 새벽엔 비탈진 계단에 주저앉아 별을 털었네

차차 좋아질 거야, 밑도 끝도 없이

헛짚은 날들이 지금의 나를 증명해놓았네

거짓말이고 싶었던 세월은 끝내 위증되지 않았네

천장 뚫고 내려와 아랫목 고집하는 물방울마냥

안전핀 없는 일상은 어디든 돌파구를 내고 싶었네

아무 곳이나 뿌리 내려 자지러지고 싶었네

헛물켠 시간들이 나를 세월의 방죽 위에 뜨게 했네

물이 스미면 개구리밥이 햇볕에 말라붙듯

내가 떠다닌 생활사도 뿌리를 감출 것이네

내가 버석버석 말라비틀어지면

햇볕은 그제서야 내 가 떠 있던 세월의 방죽

발목 빠지지 않게 천천히

거닐 것이네


- 『거미』, 창비, 2002.



   * “산 노을에 두둥실 홀로 가는 저 구름아/ 너는 알리라 내 마음을 부평초 같은 마음을”이란 노래 ( 박성훈 작사, 현철 노래‘내 마음 별과 같이’)를 종종 듣고 흥얼거리기도 하는데, 정처 없이 떠나는 나그네의 이미지를 하늘의 구름과 물 위 부평초에 견준 것이다. 부평초는 뿌리가 없는 게 아니라, 뿌리가 있지만 그 뿌리가 바닥에 닿지 않고 떠 있기에 바람이 불거나 하면 물 위에 이리저리 쏠리기도 하고 떠가기도 할 것이다. 그 부평초(浮萍草)의 다른 이름이 개구리밥이다.

현철의 노래가 다소 낭만적인 떠돌이 모습을 그리게 한다면, 시인의 노래는 일상에 견실히 뿌리내리고 싶은 욕망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바깥에서 바깥으로 고생스레 떠도는 현실에 대한 쓸쓸한 고백에 가깝다. 정작 필요한 것은 놓쳐버리는 “헛짚은 날들”과 애쓴 보람도 없이 “혓물켠 시간들”이 현재의 자신을 증명할 뿐인데 “세월의 방죽”에 갇혀 둥둥 떠 있는 모습으로 귀결되고 만다.

생활에 바둥거릴수록 가난은 깊어지고, 짐 꾸려 새로운 것을 모색해도 가난은 떨어지지 않는다. 달빛에 목메여도 별빛에 희망을 갖기도 하려는지 “차차 좋아질 거야”란 믿음을 간직하려 하지만 그 믿음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둥둥 떠다니는 모습이다. 급기야 시인은 “아무 곳이나 뿌리 내려 자지러지고 싶었네”라는 소원을 낸다. 여기서 ‘자지러지다’는 기운이 다하여 기절하듯이 쓰러지다는 의미이겠지만, 어떠한 정도가 아주 심한 상태에 있음을 나타낼 때도 쓰는 말이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개구리밥 신세일수록 자지러지고 싶은 마음의 기세는 더할 테다. 이런 개구리밥 같은 인생을 위해서 더 폴짝 뛰라는 야박한 소리를 할 게 아니라 세상사에 혐의를 두고 고민하는 자세가 필요해 보인다. 그저 뿌리 내리고 살고 싶다는 간단한 바람조차도 전혀 간단하지 않게 만들어버리는 세상사가 개구리밥을 몹시 흔든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