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신의 꿈 / 김인육
조신(調信)의 꿈 / 김인육
꽃을 생각한다
한 열혈 사내의 최후를 생각한다
제 모가지를 뚫어 콸콸 쏟아지는 피를
뜨겁게 꽃으로 피워내던 사나이
그 처절한 격정을, 열애를, 생각한다
다 버리고, 본원마저 버리고
오로지 표적했던 단 하나의 꿈
참 우습구나
굶주리고 헐벗고 빌어먹는 동안
거추장스런 것이 바로 당신이었다니!
그 혐오의 실재가 사랑이었다니!
지우자
허무의 나, 이율배반의 나
햇볕 켜켜이 알몸으로 나를 말리자
극한으로 가벼워져서 마침내 내가 나를 잊을 때까지
간을 꺼내고
부질없이 쿵쾅대던 심장도 꺼내고
세상 앞에 무릎 꿇린 저 아귀 같은 창자도 마침내 꺼내고
하루, 하루, 가벼워져
어느 가을날 문득 투명한 바람이 되자
잠자리의 날개처럼, 나
꽃 피는 봄날의 반짝이는 여백이 되자
속절없는 한 생을 비우고
눈 뜨면 이미 아닌, 꿈의 생을 지우고
저 부신 적멸로 가자
사랑아, 너도 같이 그렇게 가자!
-『잘 가라, 여우』, 문학세계사, 2012.
* 『삼국유사』에 실린 ‘조신의 꿈’은 한 편의 짧은 소설이다. 중의 신분이었던 조신은 태수의 딸을 흠모하지만 그녀는 다른 데 시집을 가 버린다. 부처를 원망하던 조신은 꿈속에서 태수의 딸을 만나 그렇게 바라던 부부의 연을 맺는다. 반평생 살면서 자식을 다섯 두었지만 굶주림으로 큰아이를 잃고, 갈수록 더해지는 생활고를 어쩌지 못하고 아이 둘씩 나누어 헤어진다. 아내가 먼저 제안하고 조신이 이를 선뜻 받아들인 결과다. 한때 사랑에 자신의 모든 걸 던지고 전념했던 조신조차도 사랑이 우환의 시작이었다는 아내의 말을 부정하지 않는 것은 현실의 고통 때문이었을 것이다. 꿈의 일이긴 하나, 조신이 하룻밤 새 늙은이가 되었다든지, 큰아이 묻은 곳에서 돌미륵이 나왔다든지 하는 얘기를 덧붙이며 꿈과 현실의 고리를 이어두는 점도 꽤 흥미롭다.
시인의 말을 빌면, 조신 이야기는 “격정”과 “열애”에 사로잡혀 “오로지 표적했던 단 하나의 꿈”이 일순간 무너졌을 뿐만 아니라, 그 단 하나의 꿈인 ‘사랑’이 “거추장스런 것”, “혐오의 실재”로까지 인식되는 데까지 나아간 꼴이다. 우습기도 하고, 허무하기도 하고, 지독한 이율배반에 아연하기도 하지만, 이를 두고 소설 속 이야기라고만 치부할 수 없는 게 지금의 현실이기도 하다. 새삼 이혼율을 따지지 않더라도 또 구구한 사정들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갈등과 불화의 원인이 되고, 사랑마저 우습게 만들며 남보다 못한 사이로 멀어지게 하는 일이 결코 적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면 상황은 더 나쁠 수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실망을 안겨주어 사랑의 감정을 말려버린 것이니 마음이 돌아선 자리는 더더욱 봉합되기 어려울 것이다.
상황이 이러할진대 조신 이야기에서 뭘 배울 수 있을까. 생활로 사랑을 뉘우치지 않도록 최소한의 생계 보장에 대한 사회적 동의와 실천을 말할 수도 있겠지만, 시인은 사회문제보다는 개인의 마음가짐에 초점을 맞추어 조신을 닮은 현대인의 각성을 요구한다. 파투 난 사랑에 대해서 먼저, 자신의 책임으로 안아서 내 안의 것을 꺼내고 말리고 가벼워지기를 원한다. 그렇게 해서 생긴 여백이나 틈이 사랑을 자유롭게 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궁극적으로는 욕심도 집착도 애정도 다 놓는 “적멸”의 길을 안내하기에 이른다.
현실의 것을 내려놓자는 시인의 깨달음을 존중하면서도, 사랑을 욕망하고 돈을 원해서 이 세상이 돌아가고 있다는 믿음을 전적으로 부정할 수 없다는 게 이 시대 ‘조신’의 고민이기도 할 것이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