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보헤미안 레시피 / 정선

톰소여와허크 2017. 12. 2. 10:23




보헤미안 레시피 / 정선



마음속에 강 한 줄기 흐르고 있다면

당신은 떠날 수 있다

뒷골목을 흐르던 불안을 벗 삼아 당신이 떠나려는 것은

집시의 피가 멈추지 않는 까닭이라고

타다 만 염통 한 근과

망막에 불타는 빛 몇 가닥과

부드러운 광기와 우울 약간

윤활유는 바람

이 재료들을 당신의 이성과 맞바꾸어

지금 있는 자리에서

탁상공론하는 그 입에 재갈을 물릴 것

정체성의 갈피를 들추는 사소한 터럭 하나라도 탈탈 털 것

뒤꼭지 잡아당기는 귀소본능, 그 여백을 보헤미안 풍으로 칠하기를

죽은 자의 영혼을 달래려 나부끼는 타르초

수시로 체위를 바꾸는 바람의 말에 귀 기울이기를

그 바람의 미행자 되어 천천히 흐르기를

발바닥에 굳은살 박이도록 걷고 걸어 닦아 놓은 방랑의 길목

낯선 입구 앞에서 당신은 가슴을 쥐어뜯을 것이다

해진 오색망토를 둘러쓴 여자가 그윽하게 당신을 바라본다면

퀭한 눈동자 속에 주저 말고 뛰어든 후

개양귀비 한 잎 머리에 꽂아주기를

심장은 펄떡이고 몸은 꽃잎이 되고

바람은 또 어디론가 떠날 궁리를 하고

떠나려 작정하기 전부터

이미 당신 속에는 수 갈래 블타바 강이 흐르고 있었다


- 『랭보는 오줌발이 짧았다』, 천년의시작, 2014.


* 보헤미안은 보헤미아 지방(현재, 체코의 서부 지역)의 집시를 일컫는 말에서 시작했다. 지금은 방랑 기질뿐만 아니라 관습이나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을 갖고 시, 음악, 그림 등에서 예술 재능을 보여주는 사람들이란 의미로 더 많이 사용되고 있다.

블타바 강은 보헤미아 지방을 관통하여 수도 프라하를 거쳐 멀리 북해 쪽으로 빠져나가는 강 이름이니 시인이 보헤미안과, 보헤미안이 환기하는 방랑과 모험과 예술을 마음 바닥에서 길어 올리는 두렛줄 같은 역할을 했을 것이다.

“마음속에 강 한 줄기” 품고 사는 동안 언제든 떠날 수 있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선 현실의 문제를 재단하는 “이성”과의 싸움이 불가피하다. 이성은 가족이나 사회가 개인에게 지우는 책임이나 윤리를 다하려는 쪽으로 작용할 여지가 크다. 자기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간에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애쓰게 되고 그렇게 해서 얻게 된 삶을 안정적이라고 자위할 수도 있겠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몇 잔 술을 비우고 “망막에 불타는 빛 몇 가닥”을 보다가 지금 이 자리가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 즈음, 먼 데서 불어오는 “바람” 소리를 듣게 된다. 그 바람의 강도가 더해져 내면의 “마음속에 강 한 줄기”를 건들게 되면 랭보의 바람 구두를 신게 될 가능성이 커질 게다.

시인은 “방랑의 길목”에서 만나는 낯선 이에게도 그 인연에 “개양귀비 한 잎” 꽂아주며 사랑의 마음을 즐기고 싶어 한다. 또한, 그 인연이 구속이 되지 않도록 “바람”을 타고 떠나야 할 것도 생각한다.

시를 읽으며 마음이 더워지는 건 동네 도랑이든 낙동강이든 미시시피 강이든 그 줄기가 내 안에서 움찔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떠나려 작정하기 전부터” 이미 강이 흐르고 있었다는 말이 실감난다. 하지만 그 강줄기는 어느 쪽으로 움직일지 감감하다. 시인의 레시피는 당신의 레시피는 뭐냐고 물어 온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