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가리왕산 숲의 비밀 / 윤준경

톰소여와허크 2017. 12. 12. 14:10



가리왕산 숲의 비밀 / 윤준경

 

 

이 쓸쓸한 나이에 비밀 하나쯤 갖는 게

무슨 큰 흉이 될까만

 

흰 눈 속에서 지금은

휴식의 숨을 고르고 있을 그대

 

푸른 입을 열어

내 작은 몸을 받아들일 때

천지는 회색에 잠겨 고요한데

알아들을 수 없는 축복의 방언이

수 수 수 온 산을 흔들었지

 

나는 어느 신선의 딸이 되어

몸은 둥둥 구름 위로 떠올라

그대의 부드러운 숨결 옆에

남은 생의 살림을 차리고 싶었지

 

인생의 황홀한 순간이 어디 오래 간 적 있던가

마침내 선잠을 깬 산새와 다람쥐와

더듬이 긴 벌레들마저 우리를 반길 때

날이 밝기 전에 나는 떠나야 했어

 

산 향기 촉촉이 묻은 그대의 손을 놓고

지금도 조금씩 꺼내보는

가리왕산 숲의 비밀, 아무도 모르지

가리왕산이 가려준

그대와 나의 은밀한 사랑이야기

 

 

-『시와 연애의 무용론, 시학, 2017.

 

 

* 가리왕산은 이름부터 예사롭지 않다. 춘천과 원주 일대에 맥국이 세력을 형성하다가 갈왕 즉위 후 고구려 군사에 쫓겨 지금의 산 위치(평창군과 정선군 일대)로 피난왔단다. 가리왕산은 그때의 왕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고, 단순히 산 모양이 볏가리를 닮아서 그리되었다는 설도 있다. 둘 다 조금씩 미심쩍지만 고만, 이름 출처도 가려지지 않는 신비로운 느낌이 있다고 해두자.

시인이 직접 경험한 가리왕산은 이름 이상으로 더 신비롭다. 여름날, 아름드리 고목 아래 바람이 지나는 광경을 상상해보자. 바람 따라 푸른 잎들이 몸을 뒤집으며 햇살을 튕기기도 할 것이고, 그 사이사이로 푸른 입알아들을 수 없는언어를 내놓을 때 몸 또한 즐거이 반응하지 않겠나. 숲의 정령은 이성이 되고, 자신은 신선의 딸이 되어 연애 감정에 빠진들 아예, 살림을 차린들 흉 될 게 전혀 없다. 약간의 면구함조차 가리왕산이 가려 주니 걱정 놓아도 좋겠다.

시인은 숲에 발을 들였다가 신령스런 기운을 받으면서 내밀한 사랑으로 충만한 느낌이 된다. 혼자 아는 비밀이 아까워 이렇듯 노래하고 있지만 가리왕산의 속살 하나는 여지없이 벗겨져서 이전의 비밀을 무색케 한다. 스키 활강장을 만들려고 수백 수령의 주목, 아름드리 신갈나무, 들메나무가 함부로 베어졌다. 이제, 시인을 품고 가려준 숲의 정령도 인간을 위하려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았을까. 수 수 수! 가리왕산의 소리, 고목과 풀과 짐승과 바람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이 두렵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