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의 영혼에 씌다
야구의 영혼에 씌다 / 이동훈
잠결에 야구의 영혼*이 들어오지.
자리에서 쓱 일어나
내복 유니폼으로 방문을 나가지.
창밖은 꺼질 줄 모르는 광고판 조명.
새시 문에 얼비치는 내 모습은
왼 다리를 천천히 올리지.
몸을 바로 세워 균형을 잡고 던지기 자세로 들어가지.
왼팔은 던지는 방향으로 두고
오른팔은 엉덩이 뒤로 뺐다가 어깨 위로 넘어오지.
디딤 발로 몸의 중심을 옮기며
공 던지는 시늉을 하는 거지.
상대가 없으니 싱겁긴 해도 참 열심이지.
몸이 풀린 야구의 영혼은
왼 다리를 더 높이 치켜 올리지.
몸을 뒤로 꼬았다가 풀면서 가슴을 내밀지.
팔 회전을 크게 하고 손목 스냅으로 채면서
그 쏠리는 힘으로, 전력으로 날아가는 거지.
그렇게 나를 던졌으면
넌 절대 나를 맞추지 못했을 테지.
꼼짝없이 맞아 날아갈 거였다면
한번쯤 저 광고판에 작렬하여 불꽃으로 터졌으면 싶지.
이 밤도 몸을 풀다가
스르르 빠져나가는 야구의 영혼.
자면서도 손바닥을 둥글게 마는 것은
폭포수처럼 꺾이는 마구를 익히려는 거지.
너에게 나를 소리치고 싶은 거지.
* 장수철의 시, <야구의 영혼>에서 빌림.
- 월간 《우리 시》 2016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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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의 역사는 2백년도 더 되었다. 1871년 내셔널리그, 1881년 아메리칸 리그가 결성되어 각각 발전해오면서 오늘에 이르러 거대한 산업으로 성장했다. 오늘날과 같이 리그의 우승 팀 간에 7전4선승제로 펼쳐지는 월드시리즈는 1905년부터 이어져오고 있다. 우리나라에 처음 야구가 전해진 것도 이 무렵이었다. 한 선교사에 의해서였는데 당시에는 야구를 타구 또는 격구라고 지칭했다. 이후 1923년에 조선야구협회가 발족되었으며 해방 후 대한야구협회가 조직되었다. 미국은 말할 것도 없고 1930년대에 프로야구를 시작한 일본에 비해서도 일천한 역사이지만 우리나라도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하였다.
국민의 관심을 정치로부터 멀리 떨어뜨려놓기 위한 3S(sports, screen, sex) 정책의 일환이었다. 전두환정권의 대표적인 국민 달래기 전략으로 출발했던 것이다. 35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삼성라이온스와 MBC청룡의 개막전에서 10회말 이종도가 친 굿바이 만루 홈런의 포물선은 가물가물하지만 지금도 뇌리에 그대로 남아있다. 이후 프로야구는 시시때때로 나를 포획하였고 야구의 추억은 쌓여만 갔다. 돌이켜보면 이전에는 마디게 가던 시간들이 둘째가 태어난 그해 이후 무슨 영문인지 세월은 후딱후딱 지나갔다. 시에서처럼 ‘내가 투수가 되어 자면서도 손바닥을 둥글게 마는’ 일은 없었으나 ‘야구의 영혼’에 씌는 일이 잦았다.
어떤 주말엔 야구중계를 볼까 가족나들이를 갈까 사이를 갈등하다가 집에서 야구를 보는 쪽으로 가닥을 잡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태생적인 한계로 삼성을 응원하긴 했지만 차차 팀을 떠나 선수들의 멋진 플레이 그 자체에 매료되었다. 그럼에도 역시 이만수 장효조 양준혁 이승엽 등 삼성의 대형 타자들에 대한 애정은 각별했다. 전설이 된 스타들의 이름을 대라고 하면 당장 100명 정도는 어렵지 않게 꼽을 수 있으리라. 그 중에서도 대구에선 그냥 ‘만수’로 통하던 이만수는 프로야구를 통칭하는 이름이었다. TV 9시뉴스 역사상 첫 소식으로 전한 첫 야구뉴스, 팬티만 입고 야구장을 돈 ‘사건’을 접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10년 전 일이다.
시즌이 마감되면 시무룩해졌다가 시즌의 개막과 함께 진정한 봄을 맞이하곤 했던 지난 세월이 수십 년이다. ‘야구의 영혼’에 씌어 홈런의 꿈을 양산했던 시간들이었다. 그런 야구가 점차 시큰둥해져갔다. 은퇴경기에서 연타석 홈런을 치고 그라운드를 떠난 살아있는 전설 이승엽을 더 이상 보지 못한다는 사실도 야구를 보는 시무룩한 시선에 일조했다. 시에서 인용한 장수철의 <야구의 영혼>에서도 “외야석은 ‘야구의 영혼’을 지켜보는 고독한 장소”라고 했지만 야구의 꽃은 뭐니 해도 홈런이다. 지난 플레이오프전에서 그 홈런의 폭죽으로 다시 내 가슴을 쿵쾅거리게 한 두산과 기아가 오늘 한국시리즈에서 맞붙는다. 다시 야구의 영혼에 씌어 ‘너에게 나를 소리치고 싶은’ 시간이 기다려진다.
- 권순진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