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그리운 이름 따라 - 명동 20년
이봉구, 『그리운 이름 따라- 명동 20년』, 지식을만드는지식, 2014 /(유신문화사, 1966)
해방 무렵부터 이십여 년 명동의 예술가들이 어디서 어떻게 지냈는지를 증언하는 다큐에 가까운 소설이다. 매일같이 명동의 다방이나 술집으로 출근해서 명동의 사정을 가장 잘 아는 그래서, 명동 백작이나 명동 시장으로 불리던 이봉구였기에 생생한 기록이 가능했을 것이다. 또한, <그는 한 자리에서 절대 석 잔 이상의 술을 마시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더욱이 술을 마실 때 ‘ 정치 이야기, 다른 사람에 대한 험담, 돈 빌리는 행동’ 등 세 가지 금기행위를 절대로 하지 않는 이>(이서공 글 인용)라는 말을 듣고 보면, 명동에 오래 남아 명동 이야기를 들려줄 적임자였다는 생각도 든다.
본문 중에 몇몇 사람 혹은 장소를 따라가 본다.
해방 공간에 “먹는 데 주리고 술에 주린 사람들이 명동거리에서 이름난 집”을 찾아다닐 때 대학병원에 입원해 있던 오장환이 에덴 다방을 찾는다. 이전에 관훈동에 남만서방이란 책방도 내고 이상의 자화상 그것도 “연필로 그린 것인데 머리는 무성한 잡초였고 수염은 깎지 않고 버려둬 갈대밭 같아” 손님들이 고개를 기웃거리게 했다는 오장환이다. 오장환은 해방의 감격으로 <병든 서울>을 읊조리며 명동의 중심이 되는 듯했으나 곧 명동 거리에서 사라져갔다.
에덴 다방에 이어 문을 연 마돈나 다방엔 김동리, 조연현 등이 모였고 이용악이 사나운 얼굴로 자주 출입했는데, 이용악은 술에 취하면 “억센 함경도 사투리로 곧잘 <분수령>, <낡은 집>, <오랑캐꽃>의 자기 시를 무아경에 읊조리는 것이었다”. 그런 그도 오장환 뒤를 이어서 곧 사라지고 만다.
번성하던 명동 거리는 6.25로 인해 “충무로 쪽으로 절반이 타 버려 ‘명동장’ ‘무궁원’ ‘돌체’ ‘휘가로’가 빈터만 남아 있었”고 “납치 또는 월북으로 이 거리의 단골들이 보이지 않았다”하더니, 중공군 개입으로 한번 더 밀리고 수복했을 때의 명동은 “옛 모습조차 찾을 길이 없도록 타 버리고 허물어져 마치 대규모의 연극의 무대장치를 대하는 것 같았다”고 증언한다.
폐허에 제일 먼저 들어선 것은 대구로 피난 갔던 모나리자 다방이다. 모나리자에 앉은 마해송은 양담배를 거절하고 국산 담배만 핀다. “어느 자리에서고 술값은 한사코 자기 주머니에서 치르고 나섰다. 주량도 막걸리 대표 서너 잔, 마음 맞는 친구와 어울리어 회포를 푸는 즐거운 술잔에 한해서 몇 잔 마시는 술이었다. 일주일에 단 한 번 수요일의 행차뿐, 이래서 수요일이면 모나리자에선 마해송의 얼굴을 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는 일화는 절제라는 입장에서 보면, 술의 한 모범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지만 명동 문인들 중에는 특수한 경우로 보인다.
모나리자에서 이봉래는 화가 김세용의 그림을 비판했다가 칼을 맞을 뻔했고, 단골이었던 시인 정운삼은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실제 자살한 장소는 부산 밀다원 다방임). 지나치게 몰려드는 손님들로 인해 모나리자가 명곡 대신 유행가를 틀자, 전혜린은 잔인한 처사라며 인근의 돌체로 방향을 돌리기도 한다.
문인과 연극 영화인들이 함께 몰렸다는 동방싸롱은, 실업가 김동근이 지은 3층 건물 동방문화회관의 1층에 자리한다. 삼층 회의실에선 박인환의 《선시집》 출판기념회가 열렸는데, 이봉구는 자신과 함께 명동을 대표하는 얼굴에게 인상적인 평을 남긴다. “기쁨과 흥분과 감격의 도가니 속에서 그의 생애 최대 최고의 환호 속에 잠겼던 밤이기도 했다. 이날 밤은 박인환을 위한 밤이기도 했지만 명동 거리의 청춘과 낭만이 최고조로 꽃피었던 두 번 다시 없는 밤이라고도 할까-”
동방싸롱 앞 빈대떡집에서는 박인환이 작사하고, 김진섭이 곡을 붙이고, 임만섭이 노래했다는, 이 모든 게 즉석에서 이루어졌다는 “세월이 가면”이 탄생되기도 했다. 이상 기일을 앞두고 이상 때문에 술을 마신다며 연거푸 술을 푸던 박인환은 서른 한 살의 나이로 죽는다. 비보를 접하고 달려온 친구들은 ‘조니 워커’를 인환의 입술에 대어주는 걸로 작별을 대신한다. 동방문화회관 사장인 김동근은 박인환이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그런 것이니 “박인환의 죽음은 하나의 자살 행위라고 말하면서 딱하고도 아깝다”는 말을 남겼지만 정작 본인도 다섯 달 후에 마포강 밤섬 다녀오는 길에 타던 배가 가라앉으면서 사망하고, 이후 동방싸롱의 운명도 급격히 기울게 된다. 김동근의 죽음 한 달 후, 이중섭이 적십자 병원에서 사망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오상순, 변영로, 조병화 등 한때를 풍미했던 사람들은 다 전설이 되고, 1965년 정월엔 은성에서 술을 마시던 전혜린이 다음날 일어나지 못했다.
이봉구는 “지난날의 명동 거리엔 순결한 영혼의 고동이 있었으나 이제 지분(脂粉) 냄새 속에 주점 은성의 애잔만이 남아 있다 해도 내가 운명을 같이해 온 명동 이십 년! 그 그리운 눈동자 그 입술은 내 서늘한 가슴 속에 영원토록 있을 것이다”라고 마침표를 찍고 1965년 겨울날이라고 적어둔다. 그리고 또 오십 년이 더 지난 오늘이 가고 있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