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합을 뒤지며 / 김종길
설합을 뒤지며 / 김종길
골짜기에선 산벚꽃이 지고 있는
화창한 일요일 오후,
서재에서 혼자 오랜만에 설합을 뒤진다.
싸락눈 내리는 밤 소주로 지새우며
자꾸만 울고 싶다는
이제는 고인이 된 시인의 엽서,
추수가 끝난 호남의 어느 들녘,
호젓한 백제의 석탑을 배경으로
젊은 친구와 함께 찍은 빛바랜 사진,
몇 해나 지난 것일까?
그러나 그 지난날들은 지나간 것이 아니라,
지나갔기에 더욱 또렷이 지금 내 설합 속에서 되살아난다.
골짜기에선 산벚꽃이 지고 있는
화창한 일요일 오후,
어수선한 내 설합 속에선
슬픈 싸락눈이 내리고
어느 해 늦가을의 소슬한 들바람도 분다.
- 시선집『천지현황』,미래사,1991.
* “나, 김종길이우”. 졸시집을 부치고 아흔이 다 되었을 시인의 전화를 받을 줄은 몰랐다. 몇 마디 말씀 끝에 겨우, “쌤의 성탄제를 즐겨 읽었다”는 말을 덧붙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시인은 “삼 줄기 줄기 베끼면 하얀 겨릅대/ 겨릅대처럼 희고 곧은 마음들”(「달」에서)을 노래하며 “서러운 서른 살”을 두 번 더 건너는 사이, “고고(孤高)한 높이를 회복하려면// 백운대와 인수봉만이 가볍게 눈을 쓰는/ 어느 겨울날 이른 아침까지는/ 기다려야만 한다”(「孤高」에서)더니 눈이 다 녹는 봄을 기다려 두 살 때 여읜 어머니 곁으로, “서느런 옷자락”의 아버지 곁으로 갔다.
생전의 시인은 “산벚꽃이 지는”어느 해, 지난 시간들을 ‘설합’에서 본다. 표준국어대사전은 서랍만을 표준어로 인정하고 있지만 시인에겐 설합이다. 실제 그렇게 부르고 자라서 포기하기 싫었을 수도 있지만, “슬픈 싸락눈”이 내리는 곳이니 그걸 받으려면 설합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싸락눈 내리는 밤 소주로 지새우며/ 자꾸만 울고 싶다”고 엽서를 보내온 시인은 누굴까. “소주만 마시는 그대에게 꼬냑잔을 권하느니-// 이 꼬냑처럼 귀한 시를 계속 쓰게나”(「갈매기 -박재삼에게」에서) 당부했던 박재삼 시인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적으로 맞지 않는다. 설합 속 비밀을 함부로 꺼낼 순 없지만 상상하는 것은 언제든 자유다.
다시, 슬픈 싸락눈을 생각한다. 머리에서 쌀알처럼 떨어지는 비듬이 현실이라고 하더라도, 시인은 먼먼 성탄제의 밤을 생각하고, 가족과 벗과 연인과 함께했던 장면 장면을 떠올렸을 것이다. 돌아갈 수 없으나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장면들! 그러고 보니, 서랍은 추억을 열고 닫고, 빼고 닫는 ‘빼닫이’이기도 한 것을 알겠다. 뒤늦게 시의 서랍을 열며 고고(孤高)했을 선생의 삶을 생각해본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