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적 정의감 / 권순진
성찰적 정의감 / 권순진
서울 지하철 2호선 전동차 안, 건장한 40대 남자가 경로석 앞에 서더니 앉아있는 노인네를 향해 다짜고짜 “공짜 지하철 타는 주제에 뻔뻔스럽게 자리까지 차지하다니, 다리 후들거리지 않는 거 보면 서서가도 되겠구먼…” 난 처음에 내 귀를 의심하면서 무슨 영화를 찍는 줄 알았다 할머니 혼자 남고 할아버지 둘은 아무 말 없이 슬그머니 일어서더니 전동차 옆 칸으로 이동해버렸고 그 사이 남자는 그 자리에 쩍 다리를 벌리고 앉았다 차 안은 정적만이 감돌았다 방관자들은 각자 비겁에 대한 수치심을 조금씩 나눠가질 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야릇한 모멸감에 스멀스멀 몸이 가려웠다 이미 남자는 점잖게 팔짱을 끼고선 지긋하게 눈을 감고 있었다 “그참 젊은 양반 말씀 한 번 되게 고약하시네 아버지뻘 되는 노인분에게 좀 지나치지 않소 사람들이 다 보는 공공장소에서” 약발 다 떨어진 생뚱맞은 내 뒷북이었다 남자는 “아니 아저씨, 내 말이 뭐 틀린 말은 아니잖소” 세게 나오면 어쩌나 내심 쫄았는데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 말 한마디는 반사적 정의감이 아니라 치사한 갈등을 겪은 뒤에야 뱉어낸 것이란 걸 사람들이 다 알아챘으므로 오만상 쭈글시럽고 또 쪽 팔렸다
- 『낙타는 뛰지 않는다』, 학이사, 2018.
* 자가용에서 운전사 쪽 유리창이 내려지고 담배 든 손이 몇 번 나왔다 들어간다. 이렇게 흡연을 즐기는 건 그의 권리겠지만, 개중에 태운 담배를 도로에 버리는 사람이 더러 있다. 차 안에도 꽁초 버리는 데가 버젓이 있을 텐데, 자신의 차는 깔끔해야 하고 길바닥은 나 몰라라 하는 행동에 화가 난다. 앞차가 신호대기라도 하고 있을 거 같으면 쫓아나가서, 긴말 안할 테니 당장 주우라고 버럭 하는 상상을 하곤 하지만 말 그대로 상상이다. 실제 나섰다가 무슨 험한 꼴 당할지 모른다는 현실적 판단이 서면, 거꾸로 불편해하는 마음이 더 불편해지기도 한다.
시인이 경험한 지하철 무뢰한의 상식 밖의 행동은 지켜보는 이를 더더욱 곤혹스럽게 만든다. 근접 거리인 데다 막말을 듣고 자리를 내어준 피해자가 눈앞에 있으니, 가만있자니 부글부글 끓고 그렇다고 나서자니 걱정이 많다. 막가는 사람에게 대들었다가 행여 낭패를 보게 되면 자신뿐만 아니라 주위에 걱정 끼칠 사람에게 신경이 쓰였을 것이다. 사실, 시인은 웬만한 방어는 알아서 할 『낙법』(2011)의 고수이기도 하지만 낙법이란 게 피해를 최소화하는 기술일 뿐이다. 고민 끝에 시인은 자신이 앎과 양심에 따라 목소리를 낸다.
다행히 일은 그쯤에서 마무리되었지만 시인은 자랑보다 쪽팔림을 말한다. 자신의 말이 잘못된 행동에 대한 “반사적 정의감이 아니라 치사한 갈등을 겪은 뒤에야” 나왔음을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옳지 않은 일에 대해서 옳지 않다고 말하는 게 당연한데 자신은 이것저것 재면서 시간을 지체했다는 반성이다. 그런 고민이 자신의 목소리에 묻어나오는 걸 주위에서 알아챘을 거라는 말엔 동의하지만, 그래서 폼이 깎였을지는 의문이다. “반사적 정의감”이 멋져 보이긴 하지만, “성찰적 정의감” 역시 인간적인 데다 호소력이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시는 “대수롭지 않은 자기 이야기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또, “내겐 부끄럽고 자존심 상하는 생각이지만 타인에게는 남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즐거움이 되기도 한다”(‘시인의 산문’에서)더니 이 시가 꼭 그렇다. 다만, 시인이 시에서 어떤 포즈를 취했다고 해서, 독자가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건 아니다. 특히, “성찰적 정의감”이 풍기는 어감에 대해서는 각자의 경험이나 생각에 비추어 다양하게 읽을 여지가 있다.
윤동주 시인은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하며 부끄러움을 줄여나가는 삶을 살고자 했고, 김수영 시인도 “나는 얼마큼 작으냐”며 자신을 반성하며 담금질했다. 지조 있는 삶과 불굴의 저항시를 보여준 이육사나 김남주 시인도 처음부터 흔들림 없이 자기 길을 걸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돈에 대한, 명예에 대한, 가족에 대한, 더 나은 삶에 대한 “치사한 갈등” 끝에 두려움 속에서도 양심과 진실 편에 서려는 “성찰적 정의감”이야말로 시인의 미덕일 것이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