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印朱빛 / 정진규

톰소여와허크 2018. 4. 5. 00:19



印朱빛 / 정진규



이젠 이 짓도 그만두기로 했다 딴은 붓글씨를 열심히 써왔다 같잖게 낙관도 서슴없이 해왔다 印朱빛이 더 없이 좋긴 좋아서이기도 했지만 부끄러워라 정말 겁 없이도 남의 가슴에 印朱빛으로 남아 있고자 함이었다 이것은 내것이다 손대지 말라 늘 외치고 싶기도 했다 내 영혼의 지문을 남기듯 그렇게 있고도 싶었다 가당찮았다 오늘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냥 그렇게 머물렀다 가장 확실한 절망이 가장 확실한 희망이 된다 별빛은 치장으로 되는 게 아니다 이름 석 자는 문패 하나로 족하다 오늘은 이런 대목에 분명하게 머물렀다 대명천지에 홀로 있음을 아는 자는 알 것이다 오늘은 나를 많이 지웠다 있어야 할 부분만 남기고 오늘은 나를 많이 지웠다 그게 나의 印朱빛이었다


-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 문학세계사, 1990.


   * 글이나 그림을 마무리하고, 이 정도면 됐다 싶을 때 인주(도장밥) 자국을 남기니 곧 낙관이다. 글 좀 쓰는 선비라면 낙관에 대한 욕심도 있는지, 추사의 <세한도>는 도장밥 자국이 무려 네 개다. 자신의 작품에 낙관을 찍는 행위는 소유와 함께 자족과 득의의 선언이 아닐 수 없다. 작품에 대한 신뢰나 예술가의 자존심이 붉은 도장에 묻어날 텐데, 시인은 이러한 인식의 이면을 보려 한다.

도장을 뜻하는 인(印)은 卩(㔾) 모습으로 무릎 꿇은 자를 손으로 눌러 제압하는 꼴로도 새긴다. 자기를 지나치게 크게 생각하고, 남의 경배를 바라는 심리가 글자에 투사되어 있는 셈이다. 시인은 “남의 가슴에 印朱빛으로 남아 있고자”하는 욕망과 “이것은 내것이다”라는 소유욕까지 두루 경계하는 마음을 낸다. 시인이 새로 제시하는 印朱빛 길은 자신을 덜어내고, 자신을 지우는 길이다. 지극한 깨달음의 경지다.

앞서, <세한도> 낙관 중 하나는 ‘장무상망’(長毋相忘-오래 서로 잊지 말기를)이다. 글자에 담긴 사제 간의 정이 깊디깊다. 추사가 직접 인주를 찍고 건넸을 수도 있지만, 제자 이상적이 자기 마음을 담아서 후에 도장을 찍은 것일 수도 있다. 그들이 서로의 가슴에 붉게 남아 있기를 바랐던 것은 작품 자체가 아니고 그들의 마음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마음이어서 작품이 빛을 내고 있다.

시인은 지상의 문패를 버리고 고독하게 되었지만, 그의 시를 인주처럼 기억하는 독자도 적잖을 것이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