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농담이라는 애인 / 조유리

톰소여와허크 2018. 4. 22. 20:11




농담이라는 애인 / 조유리



꽃들은 농담으로 피는 거야

봐, 다정하게 웃어주는 혀들

본명을 말해 줄래? 농담이라니까

제 한 말이 발바닥을 간지럽혀

밟아 비벼도 가려워죽겠어

뒤집어 봐, 거짓말처럼

발바닥이 손바닥 되는 기분 어때?


가려움이 사라지기 전 우리는 캠프를 가야 하지

보쌈을 주문하고 매운탕을 끓이고

아홉시가 되면 숙소를 배정하고

나란히 누워야 해 머리맡이 다른 침대에

몸을 눕히면


장맛비에 계곡물이 불어서 내가 아는 침묵으로는 나를 건널 수가 없어

사랑해, 농담이야


발톱을 가진 손가락들이 정말 가려워지지

은밀할수록 이해하기 쉬운

그러니까 우리가 한 적 없는 약속은 다 잊어


괜찮지? 아무도 진짜처럼 다정하지 않으니까


- 『흰 그늘 속 검은 잠』, 시산맥사, 2018.

 


  * 진지하게 듣고 있는데 메롱 하는 얼굴로 농담이었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고, 암만 해도 농담 같은 이야기만 들려주다가 장난스런 얼굴로 지금까지 진담이었다고 다시 농하는 듯한 경우도 있다. 어느 경우든 농담은 탄력이 있는 말이다. 분위기를 돋우든 그게 지나쳐서 확 깨게 하든 일상을 새롭게 보게 하는 힘이 있다.

   농담이야말로 생의 절정이거나 변곡점으로 기능할 수 있다. 시인은 꽃이 피는 것도 농담으로 피고, 사랑한다는 말조차도 농담으로 그러하단다. 실제, 이 시도 진담과 농담 사이 진의를 좀체 짐작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농담 끝에 발바닥이 가려울 정도고, 가려움을 견디기 어려워 뒤집는 시늉을 했더니 발바닥이 손바닥이 되는 기분이란다. 이 가려움은 자연스럽지 않은 모든 관계에 바탕을 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침묵으로 나를 건널 수가 없어”라는 전언처럼 가만히 있어서 되는 일은 없다. 가려움을 부르는 다정한 말들이나 시시한 농담조차 연애 감정을 돕고, 새로운 인간관계를 결실하게 하는 면도 있는 거다.

   ‘농담이라는 애인’을 말하는 시인의 태도가 진지하다면 그것도 이상하겠지만 시어를 낯설게 부리고 연결하는 대목이 충분히 농담조이긴 하다. 농담을 두고 말의 이면을 지나치게 따지기보다는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들이고 가벼워지는 편이 나을 수도 있겠다. 다만, 농담에도 뼈가 있다더니 “아무도 진짜처럼 다정하지 않으니까”라는 결구에 마음이 오래 머물게 된다.

   다정하게 웃다가 “괜찮지?”로 끝내는 농담이 조금은 잔인하다. 농담이 심심한 생에 활력을 불어넣어 준다고 믿고 있고, 그래서 슬픔 속에서도 기어이 농담하고 마는 사람을 벗하는 게 좋다. 뒤늦게 생각하는 것은 농담 끝에 슬픔이 더해지는 경우도 더러 있다는 거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