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홀쭉한 배낭
구광렬, 『체 게바라의 홀쭉한 배낭』, 실천문학, 2009.
- 쿠바 혁명의 영웅 체 게바라. 1967년 볼리비아 전선에서 체포된 후 사살된다. 그의 배낭엔 두 권의 비망록과 녹색 노트 한 권이 들어 있었다. 비망록은 체 게바라의 일기로 여러 군데 인용되어 나왔지만, 시를 필사한 노트에 대한 이야기는 주목받지 못하다가 저자인 구광렬 시인이 자료를 모으고 공부를 해가면서 책으로 엮었다.
게릴라전을 수행하는 중에도 혁명가의 배낭엔 늘 책과 노트가 있었다. 저자가 인용한 알레이다 부인의 말에도 “그이는 언제 어디서든 책을 읽었어요. 어디서 어디로 이동을 하든, 손에서 책이 떠난 적이 없었어요”라는 구절이 있다. 어릴 때부터 독서광이었던 체는 여행과 모험에 관한 책을 좋아했다는 증언도 있다. 혁명의 씨앗도 중고 오토바이를 타고 남미 여행을 한 것이 계기가 되었지만 그 이전에 그가 읽은 책이 삶의 나침반이 되어주었을 것이다.
체가 필사한 69편의 주인공은 파블로 네루다(칠레), 세사르 바예호(페루), 니콜라스 기옌(쿠바), 레온 펠리뻬(스페인)다. 이중 니콜라스 기옌은 혼혈인종에 대한 차별을 꾸준히 문제 삼았다. 쿠바의 11만명 원주민을 몰아내고 들어온 스페인은 노동력 확보를 위해 흑인노예를 부려놓는다. 물라토 출신이기도 한 시인은 채찍으로 흑인과 물라토(스페인계 아버지와 흑인 어머니 사이의 혼혈이 많다)를 길들이는 흰손을 고발한다. 흰손은 스페인에서 미국으로 바뀌어 갔지만 지배 피지배의 관계는 여전했다. 이때 쓴 기옌의 「에멧 틸을 위한 비가」는 열네 살 흑인 소년이 미시시피 강 유역에서 백인들에 의해 살해당한 것을 소재로 한 시다. 톰 소여의 모험에서 보듯 미시시피를 낭만의 대상으로 생각해온 독자에게 “보아라, 강이 흐를 때 익은 비명들이 매달려 있는/ 침묵의 나무들을” 말하는 내용은 충격적일 수도 있겠다. 이 시는 체의 49번째 필사 시다. 체의 죽음 이후, 기옌은 “죽어서도 살고 있는 너처럼 살기 위해/ 우린 죽길 원한다네”(「사령관 체」에서)라는 추모시를 남긴다.
체가 필사한 마지막 69번째 작품은 레온 펠리뻬의 시다. “신이시여, 다시 한 번 손가락 사이로 부드러운 점토를 반죽하시어, 다시 둥글게 구를 만들어요”(「「항아리」에서)라는 표현에서 보듯 구멍이 나서 “사랑과 꿈의 연기”가 새어나간 세계를 새로 빚고 싶다는 것인데, 체에게 그런 기회가 더 이상 주어지지 않았다. 67번째 필사 시도 레온 펠리뻬의 「대모험」인데 돈키호테와 산초를 제재로 한 장시다. 저자는 체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도 같이 소개한다.
“많은 이들이 저를 무모한 돈키호테라 여기고 있음을 잘 압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돈키호테는 자신의 올바른 신념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모험가이기도 하지요.”
행동도 신념에서 생기고, 그 신념은 맹목적 자기고집이 아니라 개인 환경에 맞물려 세상에 대한 공부와 이해가 바탕이 되어 형성이 되는 것일 테다. 책을 늘 가까이 두고, 필사까지 해가면서 생사를 넘나드는 사선에서조차 의식의 곳간을 채우려는 체의 부지런함을 이 책에서 확인하는 동시에, 체의 노트를 가지고 체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저자의 부지런함도 함께 돌아보게 된다.
저자는 체를 좋아한다. 실제와 이상 사이의 거리에도 불구하고 특권을 갖지 않는 삶, 누구나 차별 없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지향했다는 데 의미를 두는 것이리라. 책상물림의 한계를 뛰어넘어 생각한 것을 실천하는 돈키호테식의 모험은 가슴을 설레게 한다. 그것이 무모하냐 아니냐로 허비하는 시간 대신에 옳다고 생각하면 바로 실천하고, 거기서 다시 배우는 자세도 삶을 활기차게 해 줄 것이다. 체 게바라를 혁명가로 살게 한 동력을 한두 가지로 말하는 건 무리겠지만, “진정한 혁명가는 사랑이라는 위대한 감성에 의해 인도된다. 사랑 없는 사람은 결코 진정한 혁명가가 될 수 없다”는 체 게바라 말이 긴 여운을 준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