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을 정리하며 / 임영석
책장을 정리하며 / 임영석
사십여 년 읽어왔던 책들을 정리하며
안부 없는 시인들이 시집을 펴보는데
아뿔사! 벌써 수십 년, 긴 세월이 지나갔다.
책들을 한 권 한 권 손에 잡고 펴보다가
얼굴도 모르면서 받아 읽은 시집들이
부정도 긍정도 없이 비문(碑文)처럼 새겨 있다.
어떤 이는 청람(淸覽)하라고
어떤 이는 혜존(惠存)하라며
앞 지면에 공을 들여
인사를 건네 왔는데
책 무덤 만들어놓고
나도 찾지 못한다.
어쩌면 내 시집도 손길 한번 못 받고서
비좁은 틈 끼어들어 꿈쩍 않고 있을 건데
잡초도 없는 무덤이 그 얼마나 답답할까.
- 『고양이 걸음』,책만드는집,2018.
* 혜존(惠存)은 보내주신 책을 은혜로 알고 잘 보존하겠다는 ‘받는 이’의 인사였겠지만 그 쓰임이 달라져서, “받아서 간직하여 주십시오”라는 의미를 갖고 ‘받는 이’ 이름 옆에 쓰는 ‘주는 이’의 인사로 더 많이 쓰인다. 청람(淸覽)은 “맑은 눈으로 읽어 주십사” 하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러니 혜존이나 청람이란 말 속에는 <제가 쓴 것을 선물로 기꺼이 드리니, 가는 정성을 생각해서 당신도 성의를 내서 읽어봐 주시면 더욱 고맙겠습니다>라는 의미가 있는 거다.
졸시집을 인연 따라 몇몇 곳에 보내고, 가는 정성보다 오는 정성이 더 고마웠던 장면이 생각난다. 무명의 후학에게 자필 편지로 몇 번이나 격려를 해온 선생이 있었고, 답글과 함께 자신의 책을 부쳐온 시인도 있었다. 권순진 시인이나 이 시를 쓴 임영석 시인은 시집 속 작품을 읽고 이를 소개하는 것으로 책 빚을 갚는다. 어쩌다 보니, 나도 이를 흉내 내고 있긴 하다. 남의 글을 읽고 감상을 남기는 것도 상당한 정성이긴 하지만 나의 경우엔 일방적으로 남을 위한다고 말할 순 없다. 게으른 자신을 돕는 면이 있고, 쓰면서 배우는 것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임영석 시인은 책장 정리를 하며 시집 한 권 한 권과 안면이 부딪쳤나 보다. 새로 읽어야 할 시집이 쌓이는 마당에 이전 것을 꺼내 읽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니 특정 시집이나 시인이 생면부지의 느낌으로 다가오는 건 특별한 일이 아니다. 다만, 그 시집의 운명을 생각하고, 자신의 시집이 혹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쓸쓸해지는 마음이 있다.
무덤 중에서는 책 무덤이 낫다고 하겠지만, 여기서는 다시 펴 볼 기약도 없이 책이 쌓이기만 하는 것이니 피하고 싶은 무덤이다. 무덤을 비켜가거나 무덤에서 부활하는 건 독자의 선택으로 결정될 일이지만 그 이전에 독자 마음을 움직이는 시인의 고투가 있어야 할 줄 안다.
이 글이 청람인 되건 말건, 책 빚을 조금 덜 수 있으면 다행이겠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