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릇 / 박연준
그릇 / 박연준
알 수 없지
가득 찬 허기란 게 얼마나 묵직한지
한때는 액체들의 이동수단
흐르는 키스들의 보관함이었지
입술을 통과해야 도착하는
키스들
다섯갈래로 흩어지는 적요가 몸을 감싸고
공기만 먼지,
그늘이 쌓이면
빈방을 채우는 무음들
시간은 바깥에서 미끄러진다
깨지지 못한 자의 비애랄까
제대로 죽기 전, 죽음에도 실패한 당혹
이 빠진 그릇이란
끝내 아무것도 적시지 못하는 자의 얼굴,
얼굴 위를 기어가는 금[線]
죽기 일주일 전
당신은 이가 네개 부러졌다고 했지
나는 모르는 척했지만
일주일을 더 살다 당신이 아주,
갔을 때
한동안 아무것도
아무것도 마시고 싶지 않았다
- 『그릇』,창비,2017.
* 그릇과 입은 꽤나 닮았다. 한자어 그릇 기(器)는 위아래로 입이 네 개 있고 중간에 개 견(犬)이 있어 의아하다. 개고기를 사이좋게 나누어 입으로 가져가는 모습이란다. 먹는 것을 개가 지키는 모습이라는 해석도 있는데 이는 개를 무시한 느낌이 있다. 개도 배고플 테니 말이다. 차라리 먹는 것 앞에서 굶주린 개가 그러하듯 체면 차리기 어렵다고 말하는 게 더 그럴싸하다.
입이 하나이듯 자기 몫의 그릇도 하나여서 공평하게 주어지고 무사하게 나누어 먹으면 좋을 텐데 세상일이 그렇지 않아 늘 삐걱거린다. 빈 그릇을 견디지 못하고 남의 그릇을 탐내다가 그릇 깨지는 소리를 낸다. 그릇 채우기에 급급해 하다가 결국, “가득 찬 허기”만 확인하게 되는 게 한 사람의 일생인지도 모른다. “이 빠진 그릇”이 되어서야 욕망을 내려놓고 주위를 살피기도 하지만 “끝내 아무것도 적시지 못하는 자의 얼굴”로 인식되기도 할 것이다. 자기 그릇을 빛내지도 못했고 남을 담는 빈 그릇 역할도 못한 탓이다. 물론, 저마다 한 그릇의 삶을 잘 살고 싶은 마음이야 누구든 다를 리 없겠지만 그 그릇의 몫을 혼자 매길 순 없는 일이다.
그릇은 그릇 명(皿)자로 쓰기도 한다. 문득, 이빨이 온전한 입 모양이 연상된다. 이즈음은 빠진 이를 인공적으로 만들어 넣고 못 넣고 문제로 갈등(먹는 이빨로 차별받지 않도록 보험 적용이 이뤄지길 빈다)이 있긴 하지만 나이 들어 이가 부러지거나 빠지는 건 순리대로 가는 거다. 그 끝에 입까지 근육을 놓게 되는 마지막 순간도 그러할 테다. 한 그릇, 한 입술의 기능을 다하게 되는 건 연민을 자아내지만 그 이상으로 마음이 쓰이는 일은 남겨진 사람들에게 어떤 그릇으로 기억될 것인가 하는 문제이기도 하겠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