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가의 꽃기린 / 정이랑
창가의 꽃기린 / 정이랑
다세대주택 3층으로 이사 온 꽃기린 한 그루
아프리카 기린을 닮지 않아 목은 짧다
목욕실 창가에 앉아 햇살과 소곤거리는 너
빨래를 하다가다 힐끔 세수를 하다가도
자꾸만 곁눈질하게 되는 것은 왜일까
우리 집 식구 모두 잠든 틈을 타서
가시투성이 뚫고 한 가닥 피어내는 꽃
그 붉은 입술이 이뻐서일까
아침이 가고 저녁은 오고 꽃잎 떨어져도
시곗바늘은 멈추지 않고 돌고 돈다
나이 한 살 더 먹는 일만큼
거울 앞의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지만
내가 웃으면 웃고 얼굴 찌푸리면 눈물 흘리는 너
오늘 누군가의 영혼이 쓰러져 가는 것인가
별똥별 하나 줄넘기 넘듯 어둠을 건너가고
손과 손 맞잡은 너와 나
21세기를 낙타처럼 걸어가고 있는 중
눈 흘리지 말기, 싸우지 말기, 미워하지 말기
짧은 목 길게 빼고 아침마다 소곤거리는 아이
꽃기린 한 그루 날마다 눈 맞추어 주는데
지금까지 누구에게 손 내밀어 준 적 있는 걸까
창가의 꽃기린으로 서 있고 싶은 날
- 『버스정류소 앉아 기다리고 있는,』,문학의전당,2011.
* 꽃기린은 나무에서 꽃대를 올려 오므린 “붉은 입술”을 내내 피우는데 그 모양새가 덩치에 비해 껑충한 것이 기린을 연상케 한다. 꽃기린의 원산지는 마다가스카르다. 마다가스카르 하면 어린왕자의 바오바브나무만 기억하다가 꽃기린을 새로 추가한다. 꽃기린은 크게 자라지 않으니 바오바브나무처럼 별을 엉망으로 만들 거라는 어린왕자의 염려는 조금 덜 수 있다.
마당이 있으면 제제의 라임오렌지나무를 기대해도 좋겠지만, 아파트나 연립주택에선 곤란하겠다. 대신 화분 식물을 가꾸며 어떤 이는 식물과 대화도 하고 적잖은 위로를 받기도 한다. 킬러 레옹이 다급한 상황에서도 화분을 챙기는 게 이해가 된다.
화분 식물이라도 조금씩 성미가 다르다. 난초처럼 까다로운 친구도 있고, 잠깐의 무관심을 용서하지 않고 금방 고사해버리는 성미 급한 친구도 있다. 시인이 목욕실 창가에 둔 꽃기린은 어느 정도의 햇빛만 있으면 크게 불만을 나타내지 않는 수더분한 친구다. 물 주는 걸 한참 잊고 있다가 뒤늦게 보게 되면 비쩍 마른 상태에서 꽃잎을 다 떨어뜨리고 있다. 그제서야 물 한 바가지 주고 햇빛에 내놓으면 며칠 만에 다시 꽃을 내서 인사할 줄 안다.
식물도 사람도 어제 또 오늘 다르다. 시곗바늘은 일정하게 돌지만 인생사나 감정은 그렇지 않다. 밖의 언짢은 일이나 화를 안으로 가져오기도 하고, 안에서 누그리지 못하고 덧나기도 한다. 이때 시인은 꽃기린의 말을 좋이 듣는다. “눈 흘리지 말기, 싸우지 말기, 미워하지 말기”다. 자신이 자신에게 하는 말로도 들리지만 꽃기린의 붉은 입술을 거치지 않았으면 이렇듯 분명한 언어로 오지 않았을 것이다.
시인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꽃기린이 자신에게 그러했듯 스스로도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내기에 이른다. 사막이 아름다운 건 우물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정작, 사막에서 힘을 내려면 우물을 나누려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걸 알겠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