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운명 / 공광규

톰소여와허크 2018. 10. 21. 20:29




운명 / 공광규

 

 

젊어서는 시를 많이 썼고

모범적인 남편이자 아버지였던 마르크스

 

1861년이었던가

주 수입원인 <뉴욕 트리뷴> 기고가 미국 남북전쟁으로 끊기자

많은 양의 잡문을 쓰는 일을 하다가

그것도 어려워지자 철도사무소에 취직하기로 결심했는데

 

악필 때문에 취업에 실패했다고 한다

 

그가 만일 철도사무소 노동자로 눌러 앉았더라며

자본이라는 책이 태어났을까

 

1990

내가 현실 부정적인 시집을 냈다는 이유로

공기업에서 해직 되지 않았다면

지금 이 원고를 쓰고나 있을까

 

- 파주에게, 실천문학, 2017.

 

 

* 삶을 움직이는 건 우연인가? 필연인가? 우연이든 필연이든 정해진 운명이란 게 있어서 그리 움직이는 것은 아닌가? 이런 질문엔 전혀, 답을 갖고 있지 않다. 답이 없으니 고민도 깊다. 등장인물이 복선에 따라 움직이거나 사건이 독자의 기대치에 크게 벗어나지 않다가도 갑작스레 예상치 못한 사건이나 결말로 귀결되곤 하는 소설은 우연에 기댄 양식으로 보인다. 시 역시 삶을 베낀 것은 다르지 않으니 우연과 운명에 대한 숱한 소고(小考)를 쥐어짜서 결실한 면이 있다.

운명에 대한 공광규 시인의 시 한 편을 읽어보지만 애초의 의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다만, 마르크스란 인물이 초점이 되니 색다른 면이 있다. 생계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마르크스가 직장 얻을 기회를 갖지 못했기에 자본론을 쓸 수 있었단다. 직장을 얻지 못한 결정적 사유가 악필이라니 결국, 악필이 공산당 선언과 자본론의 바탕이 되었다는 거다. 학문적 동지이자 경제적 후원자인 엥겔스를 만난 일도 한몫했을 것이지만, 악필이 아니었다면 모든 게 달라졌을 개연성은 부인 못한다. 악필이란 사소한 일로 개인의 삶이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이어지는 혁명과 반동으로 인류 전체의 역사를 새로 쓰게 했으니 어떤 소설보다 극적이다.

화가를 꿈꾸던 히틀러가 미술아카데미에 떨어지지 않았거나, 그림엽서를 팔다가 세속적인 성공을 거두었다면 지옥의 아우슈비츠는 피할 수 있었을까. 이처럼 위와 비슷한 사례는 셀 수도 없이 많겠지만, 시인은 자신의 문제로 돌아온다. 시인이 공기업에 취업하고도, 이전의 현실참여적인 활동이 문제가 되고 현실 부정적인 시집을 냈다는 게 증거 채택되면서 해고당했던 경험을 떠올린 것이다. 어렵게 들어간 직장을 잃은 것이 이후의 삶을 크게 바꾸어 놓았을 것이다. 더러 후회되는 마음도 있을 순 있겠지만, 그때 어떤 선택을 하는 게 옳으냐는 별개의 문제긴 하다.

그 사람은 어떤 선택을 해왔는지의 결과로 있다고도 한다. 그때그때의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여 부끄러움을 더는 쪽으로 선택해오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때가 있음을 안다. 내가 어떻게 하든 간에 운명은 또 다르게 작동하는 시스템인 것도 인정해야겠다. 운명에 대해선…… 우연과 필연에 기대지 않고 또 무시하지도 않고 더 걸으면서 생각해볼 문제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