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책)

<소설> 코끼리

톰소여와허크 2018. 11. 14. 21:21
김재영, 『코끼리』, 실천문학사, 2005.

  소설집에 몇몇 인상적인 작품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단편 ‘코끼리’에 대한 감상을 남겨두기로 한다. 
  ‘나’가 사는 집은 외국인 노동자 숙소다. 한때 돼지 축사였던 곳이다. 칸막이로 가림을 하고 1호실엔 미얀마 아저씨, 2호실엔 방글라데시 아주머니, 3호실에 파키스탄 노동자인 비재 아저씨와 알리, 5호실에 클럽에 다니는 러시아 아가씨가 산다. ‘나’는 4호실에 아버지와 산다. 
  ‘나’는 네팔 출신 아버지와 조선족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다. 네팔에서 천문학을 공부하던 아버지는 전구 만드는 일을 하다가 폐가 나빠지면서 상자 만드는 일로 전업한다. 가난을 견디지 못한 어머니는 집을 나간다. 
  ‘나’는 학교에서 피부가 다르다는 이유로 주먹다짐을 당하기도 하는데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매일 세숫물에 탈색제를 써서 피부가 하얘지는 꿈을 이루려고 한다. 그 일로 아버지에게 종아리를 맞고 아버지의 눈물까지 보고 만다. 자식의 건강에 대한 염려는 물론이거니와 자기정체성을 부정해야만 하는 사정이 마음을 아리게 했을 것이다. 그런 극단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사회 분위기를 고발하려는 작가의 의도도 읽힌다. 특히, ‘나’가 손가락 무덤을 만들 정도로 주변 노동자들 사이엔 손가락이 멀쩡한 사람이 드물 정도다. 오직 투자 대비 비용만을 생각하는, 착취에 가까운 중노동에 외국인 노동자들이 내몰린 까닭이다. 
  제목과 연관된 부분은 이렇게 언급되어 있다.

  “퍼체우라에 은사로 화려하게 수놓인 그 코끼리는 원래 신들의 왕 인드라를 태우는 구름이었다고 한다. “그래서요?” 창문에 퍼체우라를 달다가 그 이야기를 들은 나는 흥분해서 아버지를 재촉했다. “어느 날 창조주 브라마가 ‘세계의 알’을 깨드리면서 코끼리의 격이 낮아져 그만 우주를 떠받치는 기둥이 되었단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버지는 슬쩍 내 안색을 살폈다. “어차피 그건 힌두교 신화일 뿐이야. 신이 깨뜨린 알이란 없어.” 순간 못대가리에서 미끄러져 엇나간 망치가 아버지 손톱을 찧었다. 손톱 끝에 침을 바르고 통증을 참던 아버지는 떨어진 못을 찾으려고 두 손을 뻗어 바닥을 더듬었다. 문득 아버지가 코끼리처럼 여겨졌다. 구름보다 높은 히말라야에서 태어난 이곳, 후미진 공장지대에서 살아가고 있으니…….”

  격이 낮아진 코끼리는 바로 아버지 자신인 것이다. 한국에서 일하며 거주하는 외국인 노동자 거의 대부분이 코끼리이기도 하겠다. 
  헌법 제 11조 1항엔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고 되어 있지만 외국인 노동자는 ‘모든 국민’에 해당 요소가 되는지 안 되는지의 여부가 불투명해서 그런지 최저임금 그 아래로 받는 경우가 많고 동등한 인격자로 대우받지 못하는 설움이 크다. 
  이런 열악한 환경에 너무 시달려 그런지 외국인 노동자들끼리의 연대나 동지의식도 희박한 걸로 그려진다. 3호실의 비극이 그렇다. 막내아들 수술비용을 위해 몇 해 애써 모은 비재 아저씨의 돈을 동료인 알리가 훔쳐서 달아나고, 비탄에 잠겨 있던 비재는 다른 외국인 노동자의 지갑을 노린다. 그 장면을 목격한 직후의 ‘나’의 반응으로 소설은 마무리된다.

  “나는 눈을 질끈 감는다. 눈꺼풀 안쪽으로 은색 코끼리 한 마리가 나타난다. 구덩이에 발이 빠진 코끼리는 큰 귀를 펄럭이며 빠져나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하지만 발버둥 칠수록 뒷다리는 점점 더 깊이 빨려 들어간다. 구덩이는 삽시간에 시커먼 늪으로 변하더니 뭐든 집어삼킬 태세로 거세게 휘돌아간다. 아, ‘외’(소용돌이에 해당하는 미얀마 말)다. 현기증이 일도록 빠르게 소용돌이치는 ‘외…….’ 코끼리는 맥없이 빨려 들어간다. 미처 비명을 지르지 못하고 눈을 부릅뜬 채, 눈앞이 온통 까맣다.” 

  누구든지 평등해야 한다는 말을 무색케 하는 차별적 행위와 인식이야말로 코끼리 대신 소용돌이 속에 빠져 들어가면 좋을 것이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