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끄시는 대로(아! 해당화) / 마선숙
이끄시는 대로(아! 해당화) / 마선숙
저를 던지니
바다가 출렁출렁 검붉게 울고 있네요
당신의 당뇨와 신경통을 위해
생명을 뿌리째 켔지요
저를 사골처럼 고아 사슴피처럼 후루룩
마시고 싶은가요
목숨이 너덜너덜 떨어졌어도
온 힘을 다해 마지막 향기로 바다를 덮겠습니다
저의 꽃말이 이끄시는 대로인 것을 아시나요
모든 비극도 벙어리처럼 묵묵히 삼키겠습니다
저는 전생에 해마다 된장 고추장을 열 항아리 담그던
칠대 종손 맏며느리일지도 모르고
굴 따다 갯벌이 된 당신 어머니 혼이거나
섬에 나가 실종된 어부 아내의 그리움 혹은
철새들이 나침반처럼 심어 놓은
이정표일지도 모르지만
당신 뱃속으로 들어가 검붉게 새로이 피고 싶습니다
물 대신 눈물을 끌어올려
꽃대에 실하게 꽃망울을 키우겠어요
바다가 멀어지네요
울음꽃도 멀어지네요
서서히 점처럼
-『저녁, 십 분 전 여덟 시』, 시와문화, 2018.
* “해당화 피고 지는 섬마을”이란 노랫말(섬마을 선생님-이경재 작사, 이미자 노래, 1966년)에서 보듯 해당화는 섬마을이나 바닷가 모래언덕에서 잘 자란다. 섬 처녀의 그리움을 노래한 가사를 듣고 이인성 화가의 그림, <해당화>(1944년)를 본다. 해당화 향기를 맡거나 물을 주려는 두 어린 소녀와 사뭇 다르게 팔짱을 끼고 딴 생각에 잠겨 있는 다 큰 처자의 포즈에서도 그리움을 읽을 수 있다.
마선숙 시인의 해당화는 해당화를 빌려 와 인간의 성정을 표현하려는 이전의 노래나 그림과는 당최 다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해당화 입장에서 해당화의 눈으로 세상을 읽고 있기 때문이다. 잎이나 열매가 어디 어디에 좋다는 정도는 달게 받을 수 있으련만 뿌리가 당뇨에 좋다든지 하는 소문으로 인해 해당화는 “생명을 뿌리째” 내놓을 판이다.
해당화는 철새의 이정표 노릇뿐만 아니라 철새와 벌 나비와 벌레의 양식이 되고 휴식처도 된다. 그런 쓸모를 다하기 위해서라도 목숨을 지키며 스스로 가시까지 둘러쳤건만 작정하고 달려드는 인간을 이길 순 없다. 잡아챈 목숨이 “당신 어머니 혼”일 수 있다고 불편함을 사게 하는 게 고작이지만 이는 시인처럼 섬세한 사람이 아니면 알아차릴 수 없는 언어다.
어쩔 수 없음을 인정한 걸까. 해당화는 시인의 입을 빌려 “당신 뱃속으로 들어가 검붉게 새로이 피고 싶습니다”는 소망을 전하지만 뒤끝이 개운한 것은 아니다. 해당화의 꽃말엔 “이끄시는 대로”도 있지만 또 하나의 꽃말은 “원망”이다. 해당화 곁에서 그리움에 물드는 일도 그림 같긴 하지만, 한번쯤은 다른 누군가가 아닌, 해당화를 생각해줄 일이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