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즐거운 한때 / 고영

톰소여와허크 2019. 3. 29. 21:44



즐거운 한때 / 고영


창을 두드리는 장대비가
방 안 구석구석 빗소리를 남기고 갑니다
몸만 풀고 가기엔 아무래도 섭섭했던 모양이군요
책 속에도 빗소리로 가득합니다
떡갈나무 장대비가 숲을 건너가기 전에
나는 빗소리를 담아두려 합니다
빗방울을 움켜쥐고 있는 도토리들
도토리를 쏘아 올리는 흥겨운 떡갈나무들
숲속에 펼쳐진 춤사위를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발끝이 들려, 마음이 들려
어느새 신명난 구경꾼이 되고 맙니다
징소리가 된 빗소리
꽹과리가 된 빗소리
옹이투성이 떡갈나무 잎도 빗소리에 긁히니
한가락 노래가 되는군요
한바탕 잔치가 질퍽한 걸 보니
아무래도 오늘밤은
빗소리를 떠나보내긴 글렀나 봅니다
어린 떡갈나무들까지
저렇듯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으니

- 『산복도로에 쪽배가 떴다』, 문학의전당, 2019(개정판)

  * 소설가 이태준은 파초 잎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기 위해 창에 챙을 달지 않았다. 제때 돈을 받고 파초를 팔아넘기란 말엔 아예 신경도 쓰지 않는다. 빗소릴 듣고, 보는 날까지 보면 그걸로 족하다고 했다.  
  고영 시인은 떡갈나무 잎을 긁는 빗소리를 듣는다. 눈으로 봐서 그렇기도 하고 귀로 들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마음과 오감을 열어놓지 않으면 들을 수 없는 소리이기도 하다.
  이태준이 아꼈던 파초는 얼마 지나지 않아 시들었겠지만 이태준이 써놓은 파초 이야기 속에서 지금도 수명을 살고 있다. 고영 시인도 “떡갈나무 장대비가 숲을 건너가기 전에” 어떻게든 “빗소리를 담아두려”고 한다. 발끝이 들리고 마음이 들리는 순간은 잠시잠깐이다. 이제 다시 쉽게 잡히지 않은 것을 잡아두기 위해 고투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빗소리를 자신의 문장으로 오롯이 남기기 전엔 그냥 떠나보낼 수 없는 노릇이다.
  책을 읽는 일도, 책을 덮고 빗소리에 마음을 주는 일도, 그렇게 해서 옹이투성이 떡갈나무에 생각이 미치는 것도 그렇지 않고 세상을 사는 것에 비해서 훨씬 다채롭게 사는 일이다. 마음에 닿았다 가는 것을 몇 줄 글로나마 잡아두려는 안간힘 또한 “즐거운 한때”일지 모른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