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작품
에밀 졸라, 『작품』(1886), 일빛, 2002.
인상파 화가들이 웃음거리가 되던 시기가 있었다. 공식적인 살롱전에 들지 못한 작품을 모아서 낙선전이 열리는데,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1863)는 큰 조롱을 받으면서도 일부 지지와 함께 상당한 반향을 불러 모은다.
졸라의 『작품』은 그림의 흐름을 바꾼 이 낙선전의 분위기를 상세하게 묘사한다. 주인공 클로드는 빛에 일찍 주목한 화가로 새로운 기법을 시도하는 동류들 중에 대표격이지만 그의 <야외>도 낙선전에서 조롱을 면치 못한다. <야외>는 곧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다. 이처럼 클로드란 인물의 일부는 마네를 연상케하지만 클로드의 기질이나 주위 환경을 고려하면 졸라의 절친한 친구였던 세잔에 가깝다. 졸라와 세잔은 엑상프로방스의 중학 시절부터 30년 우정을 쌓았지만 『작품』을 계기로 멀어지게 된다. 졸라의 『작품』이 자신을 비난한 것으로 받아들인 세잔이 결별을 선언했고 졸라 역시 화해를 시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설 속 클로드의 행방을 좇다 보면, 파리의 근경도 인상파 그림처럼 선명하게 또 특징적으로 잡힌다. 살롱에 거듭 낙선한 클로드는 아내와 생 페르 다리로 나와 시테 섬 쪽을 본다. 다리 아래로 “세느 강이 쉬지 않고 저 멀리까지 흘러가고 있었다. 옛 퐁 뇌프의 아치가 보였는데, 돌들에 이끼가 끼어 노랗게 변해 있었다. 왼쪽의 수로는 거울같이 빛나는 직선 수로로서 저 멀리 생 루이 섬이 한눈에 들어왔다”는 표현에 이어 지붕의 광고를 “대도시의 이마에 핀 근대적 열병의 꽃과도 같은 모습이었다”라고도 했다. 또 “그 위로, 더욱 위로는 노트르담 대성당의 고색창연한 황금색의 쌍둥이 탑과 배후의 첨탑이 보였다. 왼쪽으로 또 하나의 첨탑이 보였는데 생트 샤펠 교회의 첨탑이었다. 이 두 첨탑은 너무도 섬세하고 우아했기 때문에 마치 여러 세기를 거쳐온 범선의 돛대와도 같이 빛을 가득 받고 공중에 매달려 미풍에 흔들리고 있는 것 같았다”라고 묘사한다. 그 섬세하고 우아한 노트르담 대성당이 근래에 화재를 입은 바 있다.
소설 속 클로드는 자기식으로 그림의 완성에 집착한다. 아내는 생활비를 아끼고 남편을 위해 기꺼이 그림 모델이 되지만 그림 속 여자에게 사랑을 빼앗긴다고 생각한다. 아내는 남편의 사랑을 자기에게 돌리려고 애쓰지만 클로드는 자기가 받은 인상을 화폭에 제대로 표현하는 데만 몰두하고 그러지 못해 절망하기를 반복한다. 자기 스타일을 베낀 동료 화가의 도움으로 살롱에 입선하고도 클로드는 망신을 당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러는 중에 가까운 지인들의 원망까지 사게 되고 끝내 완성하지 못한 자신의 그림 앞에서 죽음을 맞는다.
자신의 일에 전념하는 건 상도즈(졸라의 분신으로 보임)도 마찬가지다.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그 일이란 놈이 나를 손아귀에 쥐고 나를 책상에 못박지. 심호흡을 할 틈도 주지 않아. 그리고 그것은 식탁에까지 나를 따라오지, 나는 말없이 빵을 씹으면서도 작품 속의 대사들을 함께 씹고 있어. 외출을 해도 따라오고, 저녁 식사의 그릇에까지 들어와 있고, 나와 함께 베갯머리에서 잠을 자지. 너무나 가혹한 것은, 일단 일을 시작하면 그것을 멈출 힘이 내게 없다는 것이야. 잠의 밑바닥까지 그놈이 굼실대고 있으니까. 일 외에는 이제 아무것도 없어.”
이렇게 보면 그림에 목숨 건 클로드나 소설의 볼모가 된 상도즈나 서로 다르지 않다. 클로드는 세잔이기도 했지만 에밀 졸라 자신이기도 했던 것이다. 세잔은 이후 영향력을 높이며 세속적으로도 성공한 화가가 되었다. 졸라와 화해할 기회는 끝내 갖지 못했다고 한다. 간첩 혐의를 받는 드레퓌스의 무죄에 인생을 걸겠다고 했던 졸라는 세잔에겐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1902년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다시 소설 속 한 구절로 들어가본다. “난 그런 생각을 하면 소름이 끼쳐! 언젠가는 내가 인정을 받을 것이라는 환상이 없어도 계속 일에 대한 정열을 가질 수 있고, 세상의 욕설에도 두 발을 꿋꿋이 버티고 서 있을 수 있을까!”. 상도즈의 입을 빌린 졸라의 말이지만 이 말의 주인공은 한두 사람이 아닐 것만 같다. (이동훈)
* 그림은 ‘풀밭 위의 점심식사’(세잔, 1876-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