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드나무 불망기 / 송찬호
버드나무 불망기(不忘記) / 송찬호
내가 그 젊은 버드나무를 처음 만난 건 봄날 강변에서였다 갈대와 안개의 상단(商團)을 따라 이리저리 흘러다닌다고 했다
다음에, 부유해진 버드나무를 만났다 쇠붙이를 엄청 모았다고 했다 칼이며 냄비며 숟가락 따위가 버드나무 몸에 척척 달라붙었다 버들잎을 끊어 오래 씹으면 산고기 냄새가 났다
그 후, 휘휘 늘어진 화류(花柳)에서 다시 만났다 화류의 빚을 갚느라 화류 마구간에서 말똥을 퍼내고 있었다 면경 같은 여자가 깨져 울었다 그래도, 화류 생활은 좋아라!
훗날, 어느 절집 마당에서 늙은 불목하니로 언뜻 스쳤다 파르란 머리의 산림승처럼, 불경에도 어둡다 했다
시절 지나 그 옛 봄날의 강변에서 다시 만났다 누군가 빗돌처럼 작은 버드나무 한 채 세워놓았다 지붕도 없고 기둥의 주렴도 없이! 갈대와 안개의 상단이 하류로 흘러 흘러갔다
『분홍 나막신』, 문학과지성사, 2016.
감상- 버드나무는 뿌리나 줄기가 잘 벋어나가는 성질을 그 이름으로 취한 걸로 보인다. 물살이 빠른 곳에 갯버들이, 입지가 상대적으로 안정된 제방 위치에 왕버들이 자리 잡는다. 잔가지가 길게 늘어지는 종으로 수양버들, 능수버들 등이 있다. (김종원, ‘한국식물생태보감’ 참조)
시인은 버드나무 생을 빌려 나름의 인생 굴곡을 지닌 어떤 개인의 인생사에 대해 한 말씀 둔다. 봄날 만난 “젊은 버드나무”는 갯버들 이미지다. 물오른 버들강아지처럼 호기심과 생명감을 한껏 뽐내며 세상 모험에 기꺼이 나서려고 한다.
다음에 만난 “부유해진 버드나무”는 왕버들을 연상케 한다. 왕버들은 덩치를 키워 득의의 시간을 누린다. 제 몸으로 그늘을 최대한 확장시켜 영향력을 키운 왕버들처럼 부지런히 일하고 돈도 벌면서 자수성가한 인생이 그려진다.
세 번째 화류에서 만난 버드나무는 수양버들 이미지다. 의심스런 세상사에 돈 욕심, 사람 욕심으로 판단이 흐려질 때면 쉽게 번 돈은 쉽게 나가고 어렵게 번 돈도 쉽게 나간다. 가까이 속을 주었던 연인도 돌아서는 낭패스런 시절이다.
훗날 다시 만난 버드나무는 세속을 떠나 절에 있다. 어떤 말씀도 귀에 들어오지 않고 절에 들어서도 절 밖으로 헤매는 중이다. 참된 평화와 궁극의 경지는 과정만 있을 뿐 온전히 주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끝으로, 버드나무 왔던 곳에 또 다른 “작은 버드나무 한 채” 빗돌처럼 섰단다. 끝이 시작으로 되풀이되는 즈음에 빗돌을 떠올린 것은 제목 불망기와도 연결되는 지점이다. 이 시 자체가 빗돌에 새길 버드나무 한 생을 대신 읽어준 것이기도 하다. 자신의 삶이든 타인의 삶이든 버드나무를 포함해 삼라만상의 일이든 간에 자신이 느낀 것을 잊지 않고 애써 남기려는 정성 그 자체는 귀하게 여겨진다. 글줄 좀 쓰는 대개의 이유가 여기 있는 듯도 하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