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방갈로의 사랑 / 신현수

톰소여와허크 2019. 6. 23. 09:38

방갈로의 사랑 / 신현수

 

 

한 계절 시를 쓰지 않았다

사랑하느라 한 계절 시를 쓰지 않았다

한 계절 책을 읽지 않았다

사랑하느라 한 계절 책을 읽지 않았다

한 계절 산에 오르지 않았다

사랑하느라 한 계절 산에 오르지 않았다

이렇게 한 계절 시도 안 쓰고

이렇게 한 계절 책도 안 읽고

이렇게 한 계절 산에도 오르지 않는 일은

예전에 좀처럼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시도 안 쓰고

이렇게 책도 안 읽고

이렇게 산에도 안 가고 살아도 되는 건가, 생각하니

시를 쓰는 건 사실은 더 잘 사랑하기 위해 쓰는 것

책을 읽는 건 사실은 더 잘 사랑하기 위해 읽는 것

산에 오르는 건 사실은 더 잘 사랑하기 위해 가는 것

난 이미 잘 사랑하고 있으므로

이제 더 이상 시도, 책도, 산도 필요 없는 것 아닐까

두고 온 방갈로 아이들을 추억하느라

한 계절 시를 쓰지 않았다

광장에 나가느라

한 계절 책을 읽지 않았다

세상을 사랑하느라

한 계절 산에 오르지 않았다

 

-

천국의 하루, 작은숲출판사, 2019.

 

감상: 방갈로란 말에서 피서지에서 볼 수 있는 작은 단층집이 우선 생각났지만 시와 연결 고리를 찾기 어려워 검색해봤더니 방갈로는 라오스 푸쿤에 있는 초등학교 이름이다. 시인은 몇 해 전부터 이곳 어린이를 돕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학교에 급수 시설이 없어 전교생 60여 명이 멀리 떨어진 산골짜기에서 물을 길어다 쓰는 등 주변 환경이나 교육 시설이 열악하다. 이를 안타까워하던 시인과 동지들이 2019년 올봄 황간역에서 사진, 그림 전시회를 열어 모금운동을 전개한 바 있다.

방갈로 아이들을 추억하고 그 아이들을 돕는 일에 애를 쓰느라 시인은 한 계절 바빴다고 말한다. 시 쓰고, 책 읽고, 산에 오르는 일은 시인이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면서 여하한 경우에라도 행했던 일이지만 이마저 소홀해질 정도로 방갈로 아이들 돕는 일과 광장 나가는 일에 열중했나 보다. 그리고 이러한 선택에 대해서 시인은 잘한 일로 받아들인다. 시 쓰고 책 읽고 산에 오르는 일도 결국, “더 잘 사랑하기위한 방편일 뿐이고 방갈로 아이들과 광장으로 가는 길이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라고 믿어서다.

그렇다고 해서 읽고 쓰는 일, 자연에 가까이 가서 걷는 일이 덜 중요하다는 느낌은 아니다. 시인이 책을 덮는 것도 따지고 보면 책의 영향인 것도 무시할 수 없다. 먼 데 고생하는 아이를 위해 작정을 하고, 불편이나 불이익을 감수하더라도 거리로 나설 수 있도록 하는 동력이 그간의 읽고 쓰고 생각하는 일에 기대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읽고 쓰고 생각하는 일은 현물로 잡히지 않는 자산이요 사람다움의 양식이 되기도 하겠다.

하고 싶은 일해야 할 일이 일치되면 더없이 좋겠지만 하고 싶은 일을 잠깐 미루고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또한 훌륭한 일이다. ‘하고 싶은 일해야 할 일사이, 시인의 고민이 순정해 보이는 건 세상을 사랑하는 쪽에 방점을 두고 있어서 그럴 것이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