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책)

<에세이> 아무것도 아닐 때 우리는 무엇이 되기도 한다

톰소여와허크 2019. 6. 30. 06:57

김인자, 아무것도 아닐 때 우리는 무엇이 되기도 한다, 푸른영토, 2019.

 

 

삶은 한 번이다. 책을 읽고 공부를 하는 것도, 여행과 모험을 꿈꾸고 감행하는 것도, 한 번뿐인 삶을 의미 있게 보내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 의미는 스스로에게든 남에게든 기록을 통해서 되새겨질 때가 많다. 작가는 독서와 여행과 기록에 누구보다 충실하다. 기록하고 자주 고쳐 쓴다. “고칠 것이 있다고 자각하는 한 발전하는 거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번 산문은 숲에 기대어 있다. 숲은 걷는 사람에게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걸으면서 보고 느끼는 것들, 내면에 숙성되는 것들이 글감이 되기도 한다. 작가는 걷는 걸 좋아한다. “보행은 가없는 넓은 도서관이란 다비드 르 부르통을 인용하며 멈출 때까진 걸을 작정이다. 함께 걸을 수도 있지만 혼자 고독하게 걷는 것도 좋다. 고독은 자신이 내면을 들여다보는 여유이기도 해서, “나의 삶이 어디에 와 있는지, 내가 사는 의미는 무엇인지, 삶의 기쁨은 무엇이고,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두려워할 가치가 있는지자문하게 한다. 고독은 인생의 속도를 약간 늦추는 일이기도 하다는데 언제든 가속도가 붙을 때가 문제긴 하다. 속도를 따른다고 마음이 부치는 건 둘째 치고, 자연과 이웃의 주변 사정을 살필 여유도 줄어든다.

초겨울, 잎을 버리고 단단히 여문 붉은 열매를 안고 서 있는 팥배나무를 보면 왜 가슴이 아랫목처럼 따스해지는지, 봄에 그 나무 밑에 묻어둔 편지의 답신이 곧 도착할 것 같은 예감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문장에 더불어 온기를 느끼는 것은 오래 걸으며 옆에 마음을 주었던 경험이 글 속에 녹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앞마을 할머니의 말을 옮겨 적은 내용도 퍽 인상적이다. 흰 꽃, 분홍 꽃이 만발한 건넛산을 잘 봐두라는 것인데, 꽃을 예뻐하는 마음만 생각하는 작가에게 여름이나 가을에 그 꽃자리를 찾아가면 돌배나 개복숭아를 딸 수 있거든이란 말을 들려주니 작가는 아하!”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서재에 꽂혀 있을, 어떤 선생도 하지 못한 말씀 아닌가.

먼 바깥으로 나가던 시간이 많았던 작가는 숲 한쪽에 보금자리를 내고 기다리는 시간이 많아졌다. 이 공간에서 담장 밑 채송화처럼 자연의 일부로 지내고 싶은 작가도 백석과 장자와 로맹 가리와 니체와 내 이름을 가진 몇 권의 책들이 있는 남향 서재에 넒은 책상과 등을 받쳐줄 딱 맞는 의자 하나 들이고 싶다는 욕심은 숨기지 않는다. 글의 말미엔 로맹 가리로 인해 페루 바닷가를 찾았던 기억을 상기하기도 하다. 소설과 현장을 오가며 상념 속을 걷던 작가의 한말씀은 기록이 아니면 무엇으로 이 순간을 붙잡을 것인가. 그리하여 그날의 기록엔 산다는 건 그곳이 어디든 떠나거나 돌아오거나 둘 중 하나가 아니었나 싶다로 마침표를 내려놓았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