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인사동 아리랑 7 / 강민

톰소여와허크 2019. 7. 21. 12:34

인사동 아리랑 7

유목민 이야기 / 강민

 

날이 저문다

해가 저문다

골목길의 모습이

기우는 낙일(落日)에 젖어 낯설다

갑자기 붐비는 인파, 시끄러운 소음이 멎고

홀로 그 길을 가고 있다

이 황무지, 사막의 유목민들은 모두 어디 갔나

갈증을 풀던 그늘, 오아시스는 또 어디 갔나

문득 거기 찻집 <귀천>이 보인다

혀 짧은 소리로 부르던 천상병,

그의 부인 목순옥,

허름한 옷차림에 허름한 바랑 짊어진 민병산 선생,

4.19의 뛰어난 시인이며 그의 절친한 친구 신동문,

삐딱한 헌팅모, 멋진 홈스팡 영국풍 신사 차림의

방송작가 박이엽,

그이들이 거기 앉아 있다

움직임이 없다

슬프다

정물화된 골목을 벗어나

큰길로 나서는데

쭈그러진 모자에 카메라를 든 유목민 한 사람을 만났다

그 옆에 개량한복의 예쁜 사진작가가 웃고 있다

이 삭막한 인사동의 길잡이 부부

막힌 가슴이 뚫린다

소음이 들리고

정물화된 풍경이 움직인다

다시 한 세월은 가고

나는 또 그리운 이들을 찾아 이 거리를 헤맬 것이다

 

-『외포리의 갈매기, 푸른사상, 2014.

 

 

감상: 인사동은 참 매력적인 공간이다. 위로 북촌 한옥마을을 두고, 아래로 종각(보신각)과 탑골공원을 두고 있다. 좌우 위쪽으로부터 경복궁과 창덕궁이 그 아래에 광화문과 종묘가 나란히 있고 인사동은 그 안쪽에 있으니 서울 문화의 중심이라 할 만하다. 안국역에서 종각역이나 종로3가역 쪽으로 가는 길을 중심으로 골목마다 화랑, 고서점, 미술상, 공예점, 찻집, 술집 등이 어우러져 있었으나 쌈지길 등 세련된 현대 건축물이 등장하면서 옛 정취도 조금씩 잃어가고 있다. 특히, 고서점이나 책방은 거의 사라지고 통문관 정도만 남아있다.

시인이 찾은 유목민에 먼저 자리 잡은 사람들은, 평소 시인과 술잔을 기울이며 잘 어울렸던 문인들이었을 것이다. 거리의 철학자로 불리는 민병산은 귀천과 인근 술집을 오가며 자신의 붓글씨를 무료로 나누어주기도 했다. 4.19를 노래했던 <! 신화같이 다비데군들>을 썼던 신동문 시인은 붓을 꺾은 뒤에는 시골에 은거하며 무료 침술을 해준 걸로 유명하다. 박이엽 방송작가는 나의 서양 미술 순례(서경식) 등을 번역한 작가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이들은 움직임이 없다. 젊은 날, 시대의 울분을 나누고 예술을 말하던, 사막의 오아시스 같던 인사동이지만 언젠가부터 그곳을 메우던 사람들은 술잔을 놓고 하나 둘 떠나고 없으니 술집 상호처럼 머물지 않는 유목의 인생을 실감하게 한다.

이제 시인도 인사동이 낯설고 허전하다. 우연히 만난 사진작가 부부를 통해 아직 인연의 끈이 다하지 않음을 알고 반가운 마음이 든다. 아마도 시인과 친분이 있고, 인사동 이야기를 사진으로 남기고 있는 조문호, 정영신 다큐 사진가일지 모르겠다. 설령 그렇다하더라도 시인에게 인사동은 현재의 연을 쌓는 공간으로 기능하기보다는 점점 추억의 공간으로만 남게 될 것이다.

시인학교가 인사동을 떠났고, 귀천은 남았으되 귀천의 주인과 사람들이 떠났듯이 유목민의 이야기도 언제까지 쓰일지 알 수 없다. 이렇게 기록으로 남겨둠으로써 한때의 삶과 인사(人事)에 대해서 떠올리게 하는 것은 시인에게도 독자에게도 아주 귀한 작업으로 여겨진다. (이동훈)


* 사진은 201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