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시원산책
김용호, 『시원산책』, 정연사, 1964.
오우버 자락에 / 구수한 할머니의 옛 얘기를 싸고 /어린 시절의 그 눈을 밟으며 간다( 「눈 오는 밤에」중)
위 시로 기억되는 김용호 시인. 시에 관한 그의 산문집을 읽었다. 자신의 시뿐만 아니라 다른 시인들의 시를 많이 소개해두고 있는데, 김남조의 시가 두세 번 언급되어 있다.
고요한 밤 / 내 마음은 / 한 개 그리움으로 차고 넘치는 잔 // 파랗게 언 유리창에 / 장미를 피우듯 /고운 촛불을 밝혀 둡시다.(김남조, 「장미를 피우듯」중)
이 시를 두고 시인의 상찬이 이어진다. “이 얼마나 그리움에 찬, 그리고 애틋한 겨울의 표정이요 마음씨입니까. 눈 오는 밤에 그 하얀 눈을 맞으며 시원(詩園)을 산책해 보십시오. 게다가 어디고 알맞은 곳에 당신의 마음의 캠파스를 놓고 그 곱디고운 흰 바탕에 노래를 그려보십시오. 그러면 당신의 가슴에 옮아오는, 물드는 빛깔이 한결 고울 것임에 틀림없습니다”라고 적는다. 시인의 말처럼 시의 정원을 산책하는 일이 이렇듯 아름답고 보람 있는 일이란 걸 다수가 공감하면 세상은 훨씬 그윽해질 것도 같다.
시에 임하는 시인 정신의 잘 드러난 시 한 편이 눈에 띈다.
죽음이 오는 마지막 그날까지 / 내 생명의 그 모든 것을 / 너에게 옮겨 조각해 놓아야겠다. // 부활하리라 / 부활하리라 // 그러한 내 인생의 보람을 위하여 / 이 한밤중에도 난 / 굿굿이 너함께 사는 것이다.(「원고용지」중)
이 시를 두고, 시인은 “모든 보람과 결실은 피와 땀으로 엮는 진지한 노동의 열매”라고 덧붙인다. 글의 말미에 시를 쓸 때 ‘잉크와 종이와 펜’으로 쓸 것이 아니라 ‘피와 뼈와 살’로 쓰는 것이라 했으니 온몸으로 시를 써야 한다는 김수영의 시론과 궤를 같이한다.
인용 시 중에 나는 “페노발비탈을 먹었다”로 시작해서 자신의 죽음 과정을 메모한 전봉래 시인의 유서도 있다. 피난지 부산, 남포동 스타 다방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생명의 못다 이룬, 조금도 회한 없는 진실만이 넘실거리고 있습니다. 뭉클해 오는 우리들 가슴의 파동은 바로 이 진실의 물결인 것입니다”라는 감상을 남긴다. 죽음을 두고 ‘회한이 없다’라는 시인의 표현엔 동의하기 어렵지만 진실의 파동은 충분히 수긍이 간다.
표지 장정은 수묵추상으로 일가를 이룬 서세옥 화가다. 1964년 발간 당시 책 가격은 150원으로 책정되어 있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