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주의 우물 / 배창환
동주의 우물 / 배창환
북간도 땅 명동촌 푸른 옥수수 밭 한가운데 어린 동주가 책가방 둘러메고 다니던 명동소학교가 있고, 몇 굽이 출렁이는 황톳길 걷다 보면, 사방이 확 트인 언덕 능선 아래 그가 마지막으로 돌아와 누운 햇살 고운 무덤이 있고,(그 곁에 몇 발 떨어져 송몽규 열사가 나란히 누워 있고) 언덕을 내려와 마을 안쪽에 들어 동주 집 바깥마당쯤에 이르면, 그의 기념관이 된 낡은 벽돌집 교회 지붕 위 파아란 하늘 아래, 선량하고 섬세한 문청(文靑) 동주에게 언젠가 거기 올라갈 수밖에 없을 거라는 무서운 예감을 속삭여 주던 하얀 십자가가, 아직도 높이 걸려 빛을 뿜고 있었다
모퉁이 살짝 돌면 그의 고향집 팻말이 가리키는 곳에 단아한 기와집 한 채 서 있고, 발 벗고 툇마루 올라가면 안방에 모셔 둔 낯익은 영정이 앞마당 너머 옥수수 밭 파아란 하늘을 마시고 싶어 눈을 크게 뜨고 있고, 햇살 넘쳐나는 벌판으로 이어진 집 뒤안에선 몇 그루 검은 버들이 한여름 뜨거운 매미 몇 마리를 불러들이고 있었다
그 집에 빼놓을 수 없는 것, 우툴두툴한 자갈 몇 개 박혀 있는 마당가에 그가 늘 오가며 얼굴 비춰 보던 둥근 우물이 하나, 낡은 사각뿔 덮개 아래 고요히 누워 깊고 맑은 하늘 같은 그의 눈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오래전부터 동주 집에 가면 컴컴한 그 우물 안 하늘을(거기 비친 내 얼굴을) 들여다보고 싶었지만, 우물이 나를 보고 옛 주인 아니어서 받아 주지 않을까 봐 차마 덮개를 열지 못하고 돌아서고 말았는데, 그날 이후 내 가슴에는 사시사철 동주의 우물이 차고 들어와 가을바람처럼 서늘하게 출렁이며 살고 있다
-『별들의 고향을 다녀오다』, 실천문학사, 2019.
감상 – 표제시인 「별들의 고향을 다녀오다」는 정지용과 오장환의 생가와 문학관을 답사하고 신채호 선생의 사당을 방문한 인상을 시로 남긴 것이다. 배창환 시인은 이들 세 분을 “시대보다 먼저 시대를 끌어안아 스스로 상처 입은 별들”로 호명한다. 여기에 더해 “크고 아름다운 별”의 한 자리는 윤동주 시인의 것임을 위의 시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노래했던 「서시」는 윤동주의 결백과 인간됨을 명징하게 보여주는 동시에 유서와 같은 결연한 느낌도 준다. 「서시」의 ‘하늘’은 「참회록」에서 자신을 비춰보던 ‘거울’과 다르지 않으며, 「자화상」에선 ‘우물’의 이미지로 변주되어 나타난다.
북간도 용정에 있는 윤동주 생가를 찾은 시인은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 가만히 들여다봅니다>로 시작해서,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로 끝나는 「자화상」을 외우며 동주가 자신을 비추어 보던 우물에 관심을 갖는다. 그곳 교회 십자가를 마주할 땐, <좇아오던 햇빛인데 / 지금 교회당 꼭대기 /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 어떻게 올라 갈 수 있을까요>라며 고민하다가 끝내 십자가 밑에서 희생하겠다는 의식을 내보인 젊은 동주의 「십자가」에도 생각이 미친다.
시인이 언급한 송몽규 열사나 미처 얘기하지 못했던 문익환 목사도 이 마을 출신으로 명동소학교, 은진중학교, 숭실중학교까지 같이 다닌 사이다. 숭실중학교 친구인 장준하의 죽음 이후 반독재 운동과 통일 운동의 주역이 된 문익환 목사는 훗날, 동주를 기리며, <네가 나와 같이 늙어가지 않는다는 게 / 여간만 다행이 아니구나 / 너마저 늙어간다면 이 땅의 꽃잎들 / 누굴 쳐다보며 젊음을 불사르겠니>(문익환, 「동주야」 중)라고 했으니 서로 간에 깊은 영향을 주고받았음을 짐작케 한다. 지금은 윤동주뿐만 아니라 송몽규, 장준하, 문익환도 밤하늘의 큰 별이 되어 빛을 뿌리고 있다.
다시 시로 돌아올 것 같으면, 생가 뒤안으로 온 시인이 “몇 그루 검은 버들”에 눈을 주는 장면이 나온다. 한여름에 검은 버들은 이치에 맞지 않지만 빛의 뒤편임을 감안하면 곧 수긍이 간다. 죽음과 부활이 연결되는 것처럼 동주의 삶에 드리운 그늘과 빛이 무관할 리 없다는 인식 또한 저와 같은 표현을 쓰게 했을 것이다. 시인이 열어보지도 않은 우물을 “컴컴한 그 우물”로 간주하는 심리도 그 우물이야말로 맑은 하늘을 담기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 자신을 들여다보고,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그 부끄러움을 줄여나가려고 마음을 먹는 일이 그저 환한 데서 존재감을 내보이는 경우보다 훨씬 순정한 태도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시인은 끝내 우물 덮개를 열지 않았지만, 동주의 우물물은 시인의 마중물에 닿아 사시사철 출렁이며 살고 있다고 시인은 고백한다. 또 누군가는 배창환 시인의 우물을 그렇게 받아들이며, 상처 입어 더욱 빛나는 별을 품고 “서늘하게 출렁이며 살고” 있을 거란 생각도 든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