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푸레를 사랑한 시인들
물푸레를 사랑한 시인들 / 이동훈
창밖 버즘나무에 눈길을 주면서 이 글을 쓴다. 도로 옆 아파트로 이사 오고 나서는 매연과 소음이라는 반갑지 않은 손님을 내내 치르고 있다. 5층 높이 이상으로 자라준 버즘나무가 없었다면 더 많이 심란했을 것이다. 나무 옆에 사람, 사람 옆에 나무가 있다는 게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모른다. 나무 입장에서야 인간의 거리까지 오지 않고 숲에 무리 지어 있는 것이 훨씬 나을 테니, 내키지 않는 도심에서 이만큼 견뎌주는 것이 고마울 따름이다.
도연명이 버드나무 다섯 그루를 집 마당에 심고 그렇게 좋아했다든지, 김용준 시인이 늙은 감나무 다섯 그루에 반해서 덜컥 그 집을 사고 말았다든지 하는 이야기에 지금도 귀가 솔깃해지는 걸 보면 나무 곁으로 이사 갈 날이 분명 있을 줄 안다. 아직 내 삶을 흔들 만큼 인연 있는 나무를 만나지는 못했지만 나무에 이렇듯 끌리는 것으로 보아 무연한 사이일 리 없다.
물푸레로
남은
김태정
김태정 시인은 물푸레를 만난 적이 없다고 하면서도 물푸레에 대해 잘도 이야기한다.
물푸레나무는
물에 담근 가지가
그 물, 파르스름하게 물들인다고 해서
물푸레나무라지요
가지가 물을 파르스름 물들이는 건지
물이 가지를 파르스름 물을 올리는 건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어스름
어쩌면 물푸레나무는 저 푸른 어스름을
닮았을지 몰라 나이 마흔이 다 되도록
부끄럽게도 아직 한 번도 본 적 없는
물푸레나무, 그 파르스름한 빛은 어디서 오는 건지
물 속에서 물이 오른 물푸레나무
그 파르스름한 빛깔이 보고 싶습니다
물푸레나무 빛이 스며든 물
그 파르스름한 빛깔이 보고 싶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빛깔일 것만 같고
또 어쩌면
이 세상에서 내가 갖지 못할 빛깔일 것만 같아
어쩌면 나에겐
아주 슬픈 빛깔일지도 모르겠지만
가지가 물을 파르스름 물들이며 잔잔히
물이 가지를 파르스름 물올리며 찬찬히
가난한 연인들이
서로에게 밥을 덜어주듯 다정히
체하지 않게 등도 다독거려주면서
묵언정진하듯 물빛에 스며든 물푸레나무
그들의 사랑이 부럽습니다.
- 김태정, 「물푸레나무」 전문
“권정생 선생 이후의 가장 맑은 영혼”(이원규 시인의 말)인 김태정 시인은 김남주와 고정희의 고향이기도 한 해남에 내려와 투병 생활을 하다가 2011년, 마흔여덟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생전에 남긴 시집 한 권으로 만나는 김태정은 역시, 맑다. 여기 물푸레나무에도 시인의 투명한 마음결이 느껴진다.
시인은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면서 “파르스름한 빛”에 몹시 끌린다. 파르스름은 나무 이름으로부터 자연스레 떠올려져 물푸레, 하고 소리 내어 읽을 때면 파르스름한 것이 몸으로 입으로 정신으로 온통 스미는 느낌이다. 실제 물푸레의 ‘푸’는 푸르다는 의미를 환기시키면서 입술을 내밀어 발음해야 하니, 내면에 푸른 것이 입까지 길러진 뒤 밖으로 나가는 모양새다. 이처럼 물푸레나무는 그 이름에서부터 여러 시인들의 영감을 자극하고 그들의 촉을 예민하게 만드는 뭔가가 있다.
김태정 시인에게 감각된 “파르스름한 빛”은 곧 운동하기 시작한다. 가지에서 물로, 물에서 가지로 건너가고 스며든다. 물을 긷듯이 하되 어느 한쪽으로 일방적으로 흐르지 않고, 상호간에 물들이며 평등하게 오가는 데서 시인의 사랑법을 읽는다. 그 사랑은 요란스럽지 않고 “잔잔히”, 빠뜨리지 않고 “찬찬히” 살피는 마음이며, “서로에게 밥을 덜어주듯” 나누는 마음이다. 시인은 만나지도 못한 물푸레나무의 사랑이 부럽다고 했지만, 사랑은 긴말도 군말도 필요치 않다는 걸 시인을 통해 배운다.
박정원 시인도 물푸레나무를 처음 지각하던 순간, 김태정 시인이 그러했듯이 사랑을 먼저 떠올린다. “정강뼈 아래 물빛을 온통/ 물푸레로 물들이던/ 사랑이여/ 물푸레 옆에서 물푸레를 몰랐다/ 점점 내가 물푸레로 번져가는 것을 몰랐다/ 물푸레 물푸레 되뇌기만 하면서/ 맑은 물 한 종지 건네는 그대를/ 알아보지 못했다”(박정원, 「물푸레나무」)는 서정도 물푸레나무가 아니면 착상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물푸레나무는 물푸레를 모르는 사람, 물푸레를 처음 만나는 사람을 자신의 무릎 아래로 확 당겨 물푸레나무의 신자로 만드는 힘이 있다. 물푸레를 생각하느라 저녁을 다 바친 김태정 시인이나, “물푸레 물푸레” 외는 박정원 시인은 물푸레나무의 신자이면서 동시에 물푸레에 관한 상당한 지분을 갖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한 잎의
여자를 간직한
오규원
그럼 물푸레에 관한 가장 많은 지분을 갖고 있는 시인은 누굴까. 물푸레나무에서 한 잎의 여자를 찾아낸 오규원 시인이 추천받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광고를 패러디한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1987)라는 시인의 바람을 진즉에 현실로 만들어준 게 물푸레나무다. 잠자는 물푸레 공주를 깨워 만인의 인사를 받았으니, 생전의 시인도 자신의 물푸레를 보람으로 여겼을 것이다.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女子, 그 한 잎의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女子만을 가진 女子, 女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女子, 女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여자, 눈물 같은 女子, 슬픔 같은 女子, 病身 같은 女子, 詩集 같은 女子, 그러나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女子, 그래서 불행한女子.
그러나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女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女子.
- 오규원, 「한 잎의 女子」 전문
이 시로 말미암아 물푸레나무는 암수의 성별과 상관없이 여성의 이미지를 담뿍 갖게 된다. 뒷면 잎맥에 솜털이 있고 쇠물푸레의 흰 꽃이 유난히 솜털처럼 모여 피기도 하지만 솜털이 여성의 전유물이기야 하겠는가. 하지만 한 잎의 솜털에서 시작하여 한 잎의 맑음, 한 잎의 영혼으로 옮겨 가서 마침내 “女子만을 가진 女子”를 부르는 순간, 남자는 반대편에 서서 오로지 여자를 기리는 존재가 된다. 계집 녀(女)의 형상이 두 손 모은 자세로 알려져 있지만 생명을 안고 있는 피에타 상이기도 하다.
그런 여성에 대한 일방적 기림 대신에 “病身 같은 女子” “詩集 같은 女子”로 상투성을 피해 간 데에 이 시의 묘미가 있다. 다른 선택지가 있음에도 누군가를 위해 “女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여자”로 스스로를 가두니 답답하기도 했을 것이다. 물론 “병신”도 애정이 담긴 표현이긴 하지만 누구든 스스로 서지 않으면 “그림자”를 면치 못하는 슬픈 존재일 뿐이다.
“시집”이란 단어가 갖는 함의는 시집에 대한 각자의 인상만큼이나 다양하겠다. 누구에겐 없어도 그만이거나 쓸데없는 수고가 되고 기껏 라면 받침대에 지나지 않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꿈꾸게 하고, 일상을 의미 있게 하고, 불면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물푸레나무 한 잎의 여자가 한 편의 시로 갈음될 수 있다 하더라도 모든 시어가 ‘여자’로 집중된 이상, 그 여자는 기본적으로 현실의 여성이거나 자기 안의 여성상에 가까워 보인다. 살면서 어느 때고 “한 잎의 맑음”으로 뇌리에 깊게 박힌 상대가 있을 테고, 그 상대를 기려서 이렇듯 노래하는 것은 설레는 일이다. 지극한 사랑 끝에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女子”로 사랑이 결실하기를 바라지만 이도 헛된 바람일까. 이제 시인은 가고 없고, 물푸레나무 한 잎에 열중했던 순간만 한 편의 시로 남았다.
물푸레에
살림을 낸
박형권
이번에는 물푸레나무의 물에 주목한 시를 한 편 만나자. 아예 물 많은 물푸레나무 안에서 살림을 내겠단다.
저 나무, 물푸레나무
안에 들어가 살림 차리면
숟가락과 냄비를 들고 부름켜로 들어가
방 한 칸 내고
엽서만 한 창문을 내고
녹차 물을 끓이면
지나가던 달빛이 창문에 흰 이마를 대고
나물처럼 조물조물 버무린 살림을 엿보겠다
나는 엎드려서 책을 읽고 있고
겨울 들판에서 옮겨온 봄까치꽃 같은 여자가 뜨개질을 하던 손을 멈추고
벽에 귀를 댄다
물푸레나무에는 물이 많아서
천장에서 똑똑 물이 떨어져
그릇이란 그릇 죄다 받쳐놓으면
실로폰 소리 나겠지
겨울 내내 물 푸다가 봄이 오겠다
여자하고 나하고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해야 서로 좋아하는 것
나의 하초와 여자의 클리토리스가 파랗게 물이 들도록
끙 끙 끙
어떻게 어떻게 힘주다 보면
나도 모르게 봄을 낳아서
갓 낳은 알처럼 모락모락 김이 나는 세상이 찾아오겠다
그때 창문을 열면?
- 박형권, 「물푸레나무」 전문
엽서만 한 창문 안을 들여다보면, “숟가락과 냄비”가 전부인 가난한 살림이 있다. 가난해서 더 풍요로운 게 예술이고 예술적 상상력이다. 물푸레 방에는 백석 같은 남자가 “엎드려서 책을 읽고 있고”, 나타샤 같은 여자가 “뜨개질”을 하고 있다. 오래전 백석 시인이 홀로 소주를 마시며 마음으로 그리던 바로 그 풍경이다. 백석이 바라던 산골엔 나귀의 응앙응앙 울음소리가 따라오지만, 시인의 물푸레나무 살림방에선 천장에서 듣는 물로 인해 실로폰 소리가 난다.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인 그릇, 그 위로 떨어지는 물방울 연주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실로폰이 낼 수 있는 가장 맑은 음의 한 곡조를 좋게 들은 느낌이다.
낭만적 상상력이 빚어낸 환상적 연주에 파랗게 물이 들었다면, 남녀가 몸으로 연주하는 “끙 끙 끙” 소리도 전혀 남사스럽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소리 끝에 봄을 낳기까지 하니, 생산을 위한 화음인 셈이다. 나타샤는 백석의 기다림을 낳지만, 봄까치꽃 같은 여자는 봄을 낳는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세상”은 자연과 우주의 기운이 지펴 생명을 돕는 공간이며, 여기서 껍질을 깨고 나오는 생명은 참으로 미끈하고 단단할 것이다.
사랑하는 몸짓과 그 사랑의 결실로 김이 나는 물푸레에, 그만 “창문을 열면?” 어떤가. 들켜도 좋은 사랑뿐이다. 정작 부끄러운 것은, 김을 안 내면서도 더 뜨겁고 더 위험한 것이 즐비한 세상 아닌가. 시인은 한시라도 바삐 물푸레나무 곁으로 가고 싶은 눈치다.
물푸레
숲에서 벌레처럼
잠든 이상국
그럼, 물푸레나무 숲으로 앞서 갔던 시인의 시 한 편을 바로 만나자.
이 작두날처럼 푸른 새벽에
누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개울물이 밤새 닦아놓은 하늘로
일찍 깬 새들이
어둠을 물고 날아간다
산꼭대기까지
물 길어 올리느라
나무들은 몸이 흠뻑 젖었지만
햇빛은 그 정수리에서 깨어난다
이기고 지는 사람의 일로
이 산 밖에
삼겹살 같은 세상을 두고
미천골 물푸레나무 숲에서
나는 벌레처럼 잠들었던 모양이다
이파리에서 떨어지는 이슬이었을까
또 다른 벌레였을까
이 작두날처럼 푸른 새벽에
누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 이상국, 「미천골 물푸레나무 숲에서」 전문
물푸레나무는 상대적으로 고목이 드문데, 이는 쓰임이 많아서 어른 나무로 자라기도 전에 베어지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물푸레가 숲을 이루고 있다는 것만 해도 마음 설레는 일이다. 『나무가 민중이다』61의 저자 고주환은 문푸레골 등의 지명이 남아있는 데서, 물푸레가 아예 ‘문을 만드는 푸른 나무’에서 이름이 연유했을 개연성을 말하기도 한다. 문푸레든 물푸레든 한데 모여 살면 좋은 곳, 미천골이 바로 그런 곳이다.
미천골이란 이름은 절에서 쌀(米) 씻은 물이 내(川)로 하얗게 흘러내렸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런 해석이 나쁠 건 없지만, 미미하고 천하고 연약한 존재들이 깃드는 미천(微賤)골이라 해도 좋았겠다.
저 아래 세상은 “이기고 지는 사람의 일로” 속을 태우고 뒤집는 일이 많다. 기꺼해야 한 점 숯으로 버려지기 일쑤인 “삼겹살 같은 세상”이다. 시인은 일상을 뒤로하고 물푸레나무 숲을 찾는다. “작두날처럼 푸른 새벽”이 생명감을 한껏 돋우니 몸과 정신이 말짱해지는 기분이다. 물푸레나무 숲안에선 나무와 산새와 벌레들이 저 사는 일로 분주하긴 해도 머리 아픈 궁리도 없고 어떤 협잡도 없다. 시인은 비로소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보잘것없는 한 생명이 다른 생명을 부르는 소리를, 어쩌면 자신의 내면에서 나오는 소리를 처음으로 듣게 된 것일 수도 있다.
일상이 팍팍할수록 미천골 같은 곳을 그리워하고 몸소 찾아가기도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족과 직장과 일이 있는 삼겹살 세상을 쉽게 버릴 수도 없다. 가깝고 먼 사람들과 깊거나 사소하거나 관계를 맺으며, 소통하기도 하고 부대끼기도 하면서 대강대강 그렇게 산다. 자칫 속까지 검게 태우는 일도 있지만 고기 한 점 나누는 인정도 분명 있을 것이다.
이유
있는 고집,
이향아
사람의 마을과 물푸레 숲을 두고 ‘어떻게 살래?’ 묻거나 고민하는 것은 늘 유용해 보이고 그런 가운데 시인의 작두날 같은 시 한 줄도 얻는 것이지만, 양자 간에 하나만 고르라고 종용을 받는다면 이 또한 불편한 일이다. 둘 중에 하나를, 아니면 여럿 중에 하나를 고르라는 선택이 상당한 압력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그땐 어찌해야 할지, 물푸레나무와 너도밤나무를 똑같이 좋아하는 시인의 말을 들어보자.
여러 가지가 함께 좋을 때
그러나 꼭 하나만 골라야 한다고 할 때
나는 ‘물푸레나무 혹은 너도밤나무’라고 한다
꼭 하나만 골라야 하므로 무수한 것을 외면해야 할 때
두 길을 동시에 갈 수 없으므로 어중간한 자리에서 길을 잃을 때
나는 ‘물푸레나무 혹은 너도밤나무’라고 한다
하나의 길을 걸어서 인생을 시작하는 일
한 사람과 눈을 맞춰 살아가는 일
그리하여 세상이 허망하게 달라지는 일
눈 감고 벼랑에 서는 일 두려워 나는
‘물푸레나무 혹은 너도밤나무’라고 한다
여럿 가운데 하나만 남겨두고 모두 죽여야 하는 때
물푸레나무 혹은 너도밤나무 길고 낯선 이름
더듬거리는 나를 웃으려는가
잘라낼 수 없는
몰아낼 수 없는
돌아서 등질 수 없는 아픔을
지조 없다 하려는가
물푸레나무 혹은 너도밤나무
나 끝끝내 너 하나를 버리지 않아
이제는 안심하고 잠들 수 있겠다
- 이향아, 「물푸레나무 혹은 너도밤나무」 전문
“꼭 하나만 골라야 한다”는 물음에 최선의 선택을 고민하긴 해도, 그 물음 자체를 고민하는 경우는 드물다. 제한된 시간에 이것과 저것의 무게와 가치를 재보고, 자신과의 관계와 기대되는 미래까지 감안하여 하나를 고를 것이다. 이 선택을 미더워하지 못하고 불안해하기도 하고 선택하지 않은 쪽을 두고두고 아쉬워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자신의 선택에 의미를 부여하며 어쩔 수 없는 길이었다고 자위한다. 기왕지사, 후회를 줄이고 보람을 얻으려는 쪽으로 마음을 돌리는 것을 난사람의 자세인 양 말한다.
하지만 시인은 “꼭 하나만 골라야 한다”는 말에 ‘왜’ 그래야 하는지 의문을 갖는다. 시인은 선택에 응하지 않는 것도, “어중간한 자리”에서 길을 안 가는 것도 길임을 보여준다. 여럿이 좋은데 하나만을 무조건적으로 고르라는 것이 현실적 필요에 따른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를 당위로 받아들일 근거는 없다. 시인은 기껏 양보해서 둘을 고른 뒤에는 어느 하나도 포기하고 싶지 않단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이쪽이냐 저쪽이냐, 물푸레나무냐 너도밤나무냐를 계속 물어오더라도 시인의 선택은 “물푸레나무 혹은 너도밤나무”다. 어물어물 망설이다가 결정을 못 내리는 것이 아니라, 이유 있는 고집이다. 마지못해 하나를 선택함으로써 “세상이 허망하게 달라지는 일”도 두렵지만, 그로 인해 나머지 하나를 잘라내거나 몰아내는 일이 더 부당한 일임을 직감한 것이다. 어느 한쪽도 취하지 않는 불편부당(不偏不黨)이 아니라, 마음 가는 대로 필요한 만큼 선택하고 책임지겠다는 자세다.
시인의 선택은 존중받아 마땅하지만, 경직된 사회일수록 어느 한쪽만을 강요하고 다른 쪽을 인정하지 않는 기류가 있다. 해방 공간의 좌파와 우파도 그렇다. 각자 진영에서 자신의 논리를 갖추고 치열하게 주장하고 토의하면서 그 과정에 좌가 우를 설득하고, 우가 좌를 보완하는 관계가 건강한 사회를 뒷받침하는 것일 텐데 그렇게 하지 못한 후유증을 너무 깊고 아프게 치르고 말았다. 국민보도연맹 사건을 다룬 『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은 물푸레나무가 목격한 민간인 학살 현장을 그린 것이다. 전쟁의 빌미도 무고한 피해자도 결국 생각과 처지가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은 채 외세를 업은 힘으로 반대편을 항복시키는 데만 골몰한 탓이 크다. 힘은 승패를 내거나 균형을 이룰 때까지 폭력을 수반하고 그 폭력이 좌우 어떤 이념과도 상관없는 무수한 사람들을 애꿎은 희생자로 만들었다. 물푸레나무와 희생자가 무슨 관계가 있을까마는, 참혹한 광경을 물푸레의 맑은 이미지로 조금이라도 덜어가려는 의도가 읽힌다. 아마 물푸레나무와 너도밤나무 중에 하나를 고르지 못하는 마음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물푸레를
배우는
시간
물푸레나무에 대해서 꽤 이야기해왔지만 물푸레나무에 대해서 안다고 말할 처지는 아니다. 가장 오래된 물푸레나무를 찾아내서 천연기념물이란 선물을 준 나무학자 고규홍 작가는 그 물푸레나무가 60년 만에 꽃을 피운 사실을 두고, “나무도 분명히 알았던 거 아닐까요?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요” 하며 흥을 내기도 했지만, 나무의 속내가 꼭 그렇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하물며 나 같은 사람은 숲에서 물푸레나무를 만나더라도 알아보지 못할 가능성이 더 크다. 사실 고규홍 작가도 마흔까지는 나무와 별 인연이 없었던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이 글에 처음 소개했던 김태정 시인도 그러했고 숲 해설가이기도 한 나병춘 시인도 물푸레나무를 알지 못했다. 다만 나병춘 시인은 “물푸레나무를 아는 데 40년이 걸렸다/ 물푸레나무는 길가에 자라/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를/ 얼마나 바랬을까”(「물푸레나무 사랑」)에서 보듯 이름을 불러주는 일에 상당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는 물푸레나무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더 나은 관계는 상대를 위해 시간을 쓰는 것이고, 이름 외우기는 그 보상으로 자연스레 따라오는 것일 테다.
이제부터라도 물푸레나무를 욕심내어 공부할 마음이 있고 이름을 반가이 불러줄 수 있다 하더라도, 물푸레나무를 안다고 말하는 건 당찮은 일이다. 어떤 대상을 전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랑한다는 말로 상대를 자기 식으로 이해하는 것을 언제든 경계해야 한다. 사랑한다는 말은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에 가깝다. 물푸레나무를 읽는 시간, 간절히 바라면서도 뜻대로 되지 않는 부분을 인정하라는 말을 듣는다. 그럼에도 새로 물들이는 마음을 멈추지 마라는 말도 똑, 똑 듣는다. 창밖 버즘나무는 자신은 왜, 안 읽냐고 도로의 경적 소리를 거르지도 않고 다 들려준다.
< 참고 서적 >
김태정,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창비, 2004.
오규원,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 문학과지성사, 1978.
박형권, 『우두커니』, 실천문학, 2009.
이상국, 『집은 아직 따뜻하다』, 창비, 1998.
고주환, 『나무가 민중이다』, 글항아리, 2011.
이향아, 『물푸레나무 혹은 너도밤나무』, 고요아침, 2009.
박건웅 그림, 최용탁 원작, 『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 북멘토, 2015.
고규홍, 『고규홍의 한국의 나무 특강』, 휴머니스트,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