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란 / 유은희
뒤란 / 유은희
넓은 등에 업히고 싶을 때면 뒤란으로 갔다
뒤란은 집의 등이어서
앞마당에서 벌어지는 일들로 맘 상할 때면
어린 나를 등 뒤로 숨겨 주었다
내 귀는 가지처럼 길어져서
앞마당을 엿듣고도 못 듣는 척했다
담장 밑으로 뱀 허물 잦아들고
지붕의 박꽃 얼굴이 우는 듯해 보이면
어김없이 저녁은 왔다
앞마당 소리들이 톡톡 분질러져
굴뚝 연기로 피어오르면
마음이 매캐하고도 먹먹해졌다
두어 번의 부르는 소리가
뒤란으로 난 문턱에서 끊기곤 했다
아무도 날 찾지 못하는 곳에 숨는다 해도
누군가는 찾아줄 거라 믿었다
모르는 척 나가지 않는 것을
후회하면서도 번번이 숨을 일이 많았다
점점 나를 들키기 좋은 곳으로 숨기는 방법을 알아갔다
사는 일로 인해 맘 다칠 때 문득 뒤란을 생각한다
등이 넓은 뒤란이 없다는 걸 안 후부터
누가 부르지 않아도 두 손 들고 마당으로 나와 산다
-『떠난 것들의 등에서 저녁은 온다』, 천년의시작, 2019.
감상 – 사는 집에 조그마한 서재나 개인 밀실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런 공간은 혼자 잡다한 공상하기에 좋고 그냥 멍하니 있기에도 좋은, 누구로부터 방해받지 않는, 작아도 아늑한 공간이어야 할 것이다. 어른의 생각도 이와 같은데 사실, 사적이고 비밀스런 공간은 아이들에게 더 필요하다.
가정 안에서 싫은 소리를 내거나 듣거나 했을 때 따로 마음을 추스를 공간이 필요하며, 학교생활 중에도 교실에서만 복작이는 것보다 동아리방이나 넓은 도서관 한 쪽에 자기 아지트가 있을 때 아이의 삶이 훨씬 풍요로워질 것이다.
청산도 섬마을에서 자란 시인은 그런 점에서 크게 행운아라고 할 수 있다. 맘 상하는 일들이 생길 때마다 잠시 몸을 피할 수 있는 뒤란을 가졌기 때문이다. 더러 속상한 마음을 들키며 위로받고 싶은 유혹도 있고 실제 그렇게 되게끔 꾀도 늘었지만, 무엇보다 뒤란 자체가 어머니 등에 업힌 것처럼 큰 위로였을 것이다.
시집을 읽고 있으면, 시인에게 뒤란은 청산도란 생각도 든다. 그 곳엔 “깊이 꺼내 우는 울음 / 다 받아주는”(「느티나무 그늘은 울기 좋은 곳이다」) 느티나무 그늘이 있다. “다정큼나무 울타리 삼아”
낚시해온 각시볼락으로 저녁 식탁을 차리고 싶은 청산도 도락리 바다(「그대에게」)가 시인이 재현하고 싶은 뒤란의 풍경이다
.
시인은 섬을 나와 성장하면서 이제 옛날의 뒤란을 곁에 두고 있지 않음을 인식한다. 어머니의 등은 예전보다 작아졌을 것이고, 복잡한 세상일은 더 이상 숨어 지낼 여유조차 주지 않는다. 그렇다 하더라도 문득, 뒤란의 기억과 꿈이 있어 잠시 멈춰서보게 되는 것이 이렇듯 주위를 뜨듯하게 한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