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뒤란 / 유은희

톰소여와허크 2020. 1. 8. 13:25




뒤란 / 유은희

 

 

넓은 등에 업히고 싶을 때면 뒤란으로 갔다

뒤란은 집의 등이어서

앞마당에서 벌어지는 일들로 맘 상할 때면

어린 나를 등 뒤로 숨겨 주었다

 

내 귀는 가지처럼 길어져서

앞마당을 엿듣고도 못 듣는 척했다

 

담장 밑으로 뱀 허물 잦아들고

지붕의 박꽃 얼굴이 우는 듯해 보이면

어김없이 저녁은 왔다

 

앞마당 소리들이 톡톡 분질러져

굴뚝 연기로 피어오르면

마음이 매캐하고도 먹먹해졌다

 

두어 번의 부르는 소리가

뒤란으로 난 문턱에서 끊기곤 했다

 

아무도 날 찾지 못하는 곳에 숨는다 해도

누군가는 찾아줄 거라 믿었다

 

모르는 척 나가지 않는 것을

후회하면서도 번번이 숨을 일이 많았다

점점 나를 들키기 좋은 곳으로 숨기는 방법을 알아갔다

 

사는 일로 인해 맘 다칠 때 문득 뒤란을 생각한다

 

등이 넓은 뒤란이 없다는 걸 안 후부터

누가 부르지 않아도 두 손 들고 마당으로 나와 산다

 

-『떠난 것들의 등에서 저녁은 온다, 천년의시작, 2019.

 

 

감상 사는 집에 조그마한 서재나 개인 밀실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런 공간은 혼자 잡다한 공상하기에 좋고 그냥 멍하니 있기에도 좋은, 누구로부터 방해받지 않는, 작아도 아늑한 공간이어야 할 것이다. 어른의 생각도 이와 같은데 사실, 사적이고 비밀스런 공간은 아이들에게 더 필요하다.

가정 안에서 싫은 소리를 내거나 듣거나 했을 때 따로 마음을 추스를 공간이 필요하며, 학교생활 중에도 교실에서만 복작이는 것보다 동아리방이나 넓은 도서관 한 쪽에 자기 아지트가 있을 때 아이의 삶이 훨씬 풍요로워질 것이다.

청산도 섬마을에서 자란 시인은 그런 점에서 크게 행운아라고 할 수 있다. 맘 상하는 일들이 생길 때마다 잠시 몸을 피할 수 있는 뒤란을 가졌기 때문이다. 더러 속상한 마음을 들키며 위로받고 싶은 유혹도 있고 실제 그렇게 되게끔 꾀도 늘었지만, 무엇보다 뒤란 자체가 어머니 등에 업힌 것처럼 큰 위로였을 것이다.

시집을 읽고 있으면, 시인에게 뒤란은 청산도란 생각도 든다. 그 곳엔 깊이 꺼내 우는 울음 / 다 받아주는”(느티나무 그늘은 울기 좋은 곳이다) 느티나무 그늘이 있다. “다정큼나무 울타리 삼아

낚시해온 각시볼락으로 저녁 식탁을 차리고 싶은 청산도 도락리 바다(그대에게)가 시인이 재현하고 싶은 뒤란의 풍경이다

.

시인은 섬을 나와 성장하면서 이제 옛날의 뒤란을 곁에 두고 있지 않음을 인식한다. 어머니의 등은 예전보다 작아졌을 것이고, 복잡한 세상일은 더 이상 숨어 지낼 여유조차 주지 않는다. 그렇다 하더라도 문득, 뒤란의 기억과 꿈이 있어 잠시 멈춰서보게 되는 것이 이렇듯 주위를 뜨듯하게 한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