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드나무 아래 흰 말을 묶어 두고 / 김경윤
버드나무 아래 흰 말을 묶어 두고 / 김경윤
버드나무 아래 흰 말을 묶어 두고
그대로 어디로 갔는가
수양인지 능수인지 모를 저 버들잎만
치렁치렁한 가지에 말 울음을 매달았네
외로운 날이면 먼 들길에 나가
풀벌레와 화초들을 벗 삼아 지내다
저녁노을과 흰 달빛으로 돌아오던 그대는
세상에 살았지만 늘 세상 밖 사람이었네
누군가는 그대의 말(馬) 앞에서
우국충정을 생각한다지만
나는 버드나무 아래 묶인 흰 말의 눈빛 속에서
고독한 한 시인을 생각한다네
고삐도 안장도 없는 저 말이야말로 그대가 꿈꾸던 삶이 아니던가
들판을 달리는 말처럼 살고 싶었던 그대는
버드나무 아래 흰 말을 묶어 두고
지금 어디에 가 있는가
주인 없는 이 고적한 백포 별서*에는
배롱꽃만 고요히 지고 있네
* 공재 윤두서의 별서가 있는 해남군 현산면 백포리
- 『슬픔의 바닥』, 문학들, 2019.
감상 - 강진 다산초당 유배 시절 정약용은 해남 녹우당을 들러 그곳 서책에 적잖은 영향을 받은 걸로 알려져 있다. 녹우당 주인은 어부사시사를 썼던 윤선도며, 그의 증손자가 윤두서다. 윤두서는 정약용의 외증조부가 되니 촌수가 멀지 않다. 녹우당 옆 기념관에서 윤두서의 자화상을 볼 수 있다. 윤두서 그림의 상당 부분은 『해남윤씨 가전 고화첩』 2권에 남아 전해지고 있다. 시인이 보았던 그림은 제목 그대로 “버드나무 아래 흰 말을 묶어” 둔 <유하백마도>일 텐데 화첩에 담겨 있다.
녹우당에서 남서쪽으로 조금 내려서면 김남주 시인 생가와 고정희 시인 생가가 나온다. 시인은 현재 ‘김남주시인 기념사업회’ 회장을 맡고 있다. 여기서 바다 쪽으로 더 나아가면 백포 별서라고 얘기한 윤두서 고택이 있다. 옛날, 윤선도가 보길도와 녹우당을 이 길로 오가고 했을 텐데 후손인 윤두서가 말년을 보낸 곳으로 알려져 있다. 시인은 여기 배롱나무 아래 머물며 윤두서의 그림과 삶을 떠올리고 있다. 남쪽 방면으로 좀 더 내려가면 미황사가 나온다. 물푸레나무의 김태정 시인이 생의 마지막을 보낸 곳이다. 그 미황사 뒤편에 김경윤 시인의 아들이 잠들어 있고 그로 인한 ‘슬픔의 바닥’이 이 시집의 주된 정서로 큰 울림을 주고 있다.
인용한 시는 굳이 아들의 부재를 연상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오히려 윤두서 혹은 시인 자신의 자화상에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실제 윤두서의 <자화상>을 두고 벗이었던 이하곤은 “6척도 안 되는 몸으로 사해(四海)를 초월하려는 뜻이 있네”로 시작하는 시를 남겼는데, 이를 두고 유홍준은 “<자화상>에 서린 저 꿋꿋한 기상과 처연한 고독의 그늘, 그것이 이제부터 알아볼 공재 윤두서의 인생과 예술”(『화인열전 1』)이라고 말한 바 있다.
증조부 윤선도부터 정계에서 밀려난 가계에서, 그것도 당파 싸움이 절정인 숙종 연간에 윤두서의 선택 역시 낙향이었다. 물론 지역에선 부호로 이름을 떨쳤지만 자기 뜻을 펼 기회가 좌절된 사대부의 한이 컸을 것이고, 말년에는 가족과 친구의 잇따른 죽음으로 인한 침잠이 또한 깊었을 것이다.
<유하백마도>를 그릴 때의 화가 마음을 헤아리기 쉽지 않지만 그림을 보는 사람은 또 자신의 인상을 가지고 그림을 새로 보게 된다. 시인은 백마의 눈빛까지 읽으며 “고삐도 안장도 없는” 모습에 주목한다. 아닌 게 아니라 그림을 보면 버드나무 줄기도 바람에 살랑인다. “들판을 달리는 말처럼” 거칠 것 없는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다는 욕구가 팽배해지는 순간이다. 그런 중에도 버드나무에 묶인 줄을 끊어야 하는 문제가 남아있긴 하다. 끝내 자유를 포기하지 않되, 자유로울 수 없는 현실적 속박을 견뎌야 하는 존재가 시인이 아닌가 싶다. 해남과 인연이 있는 윤선도, 윤두서, 정약용, 김남주, 고정희, 김태정 시인이 그러한 고민을 살다가 갔다. 해남 출신 김경윤 시인 역시 해직 교사의 아픔을 딛고 슬픔의 바닥을 딛고 스스로 자유가 되고픈 마음일 것이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