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이 나를 살게 하고 / 천양희
그 말이 나를 살게 하고 / 천양희
접어둔 마음을
책장처럼 펼친다
머리끝에는 못다 읽은
책 한 권이 매달리고
마음은 또
짧은 문장밖에 쓰지 못하네
이렇게 몸이 끌고 가는 시간 뒤로
느슨한 산문인 채
밤이 가고 있네
다음 날은
아직 일러 오지 않은 때
내 속 어딘가에
소리 없이 활짝 핀 열꽃 같은
말들, 언로(言路)들
오! 육체는 슬퍼라. 나는 지상의 모든 책들을 다 읽었노라던 말라르메의 그 말이, 비가 오고 있다. 움직이는 비애를 알고 있느냐는 김수영의 그 말이, 흠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던 랭보의 그 말이, 누가 나를 인간에 포함시켰소라던 브로드스키의 그 말이, 낮의 빛이 밤의 어둠의 깊이를 어떻게 알겠느냐던 니체의 그 말이,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던 발레리의 그 말이……
나는 본다
나에게로 세상에게로
내려앉은 말의 꽃이파리들
내 귀는 듣는다
나에게로 세상에게로
뚜벅뚜벅 걸어오는
말의 발자국 소리들
나를 끌고 가는
밑줄 친 문장들.
-『마음의 수수밭』, 창비, (개정판 2019, 초판 1994)
감상 – 어떤 선택을 해왔느냐가 곧 그 사람이란 말도 있지만, 어떤 책을 지내왔느냐가 곧 그 사람이란 말도 가능하겠다. 선택의 결과로 지금의 그 사람이 존재한다고 할 것 같으면, 책은 그 선택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을 개연성이 크다.
천양희 시인의 삶은 책에 절대적으로 빚지고 있다. 책을 읽다가 자신을 깨치는 문장들을 만나고 그 문장이 자신을 살게 했다고 고백한다. 그 문장들은 말의 길(言路)과 “말의 발자국”이 되어 자신이 걸어야 할 길을 안내하고 밝혀 주었다.
시인이 주로 인용한 말들은 슬픔과 비애와 상처를 갖고 이를 깊이 앓은 사람들의 기록이다. 그런 문장들이 때때로 어둠 속 한 줄기 빛으로 다가오니 “꽃이파리”처럼 반갑고 고마운 마음이었을 것이다.
인용한 글의 출처를 고민하며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뒤적이다가, 시인이 인용한 대목을 만나지 못하고 대신, “글로 쓴 모든 것 중에서 나는 피로 씌어진 것만을 사랑한다”를 읽고 니체의 글이 오래 사랑받는 이유를 만난 듯해서 눈으로 밑줄을 그어둔다.
브로드스키의 문장도 출처를 찾지 못했지만 그의 노벨문학상 수상수감에 밑줄 긋고 싶은 유혹이 생긴다. 책을 읽지 않는 게 가장 큰 범죄라는 말과 함께, “작가이든 독자이든 간에 상관없이, 각자의 임무는 그것이 겉으로 보기에 얼마나 우아한지를 떠나서 무엇보다도 자신만의 삶에 숙달되는 것입니다”라는 구절이 좋게 읽힌다. 책을 읽는 것이 중하고 글을 쓰는 것도 자랑이지만 무엇보다 자기 삶을 열심히 살고 자기 목소리를 낼 줄 아는 게 소중하다는 말로 들린다.
발레리의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해변의 묘지」)를 두고 남진우 시인은 이를 변용하여, “바람이 불지 않는다. 그래도 살아야겠다”(「로트레아몽 백작의 방황과 좌절에 관한 일곱 개의 노트 혹은 절망 연습」)라고 자기 생각을 덧입힌 바 있다. 폭포를 두고, 그 길이를 삼천 척이라고 했던 이백, 나의 자랑은 자멸이라고 했던 이형기, 곧은 소리를 부른다는 김수영에 이어 천양희 시인은 “명창의 판소리 완창”(「직소포에 들다」)으로 표현하며 이목을 끌기도 했다.
남과 다른 자기 목소리를 내며 울림을 주는 시편이 좋지만 이도 따지고 보면, 이전의 인생 경험과 독서 경험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공으로 생길 리 없다. 피로 쓰고 온몸으로 써야 한다는 목소리 앞에 밑줄 긋고 받아쓰기 하는 시늉도 해보지만 게으름도 쉬 버릴 수 없는 동무이긴 하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