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

톰소여와허크 2020. 2. 26. 12:09

빌 어거스트 감독, <리스본행 야간열차> 2013.

 

 

여행 사진을 뒤져보니 2019. 1. 10일 리스본에 있었다. 포르투에서 34일을 묵으면서 하루를 리스본에 다녀온 것이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미리 봤다면 무조건 열차를 고집했겠지만 그땐 아침 버스로 가서 저녁 버스로 돌아오는 일정을 택했다.

뒤늦게 영화를 보며, 리스본의 길과 언덕 그리고 상 조르즈 성이 보이는 풍경에 속으로 환호했다. 때마침 그 장면에서 쏟아지는 대사들이 인상적이었는데 나중에 확인해도 또한 그렇다.

영화 속 주인공 그레고리우스는 우연찮게 얻은 책 한 권과 책 속 열차표를 가지고 리스본에 온다. 책의 저자인 아마데우의 삶과 이야기에 매료된 그레고리우스는 아마데우의 행방을 쫓으며 그의 가족과 친구, 의사라는 직분과 레지스탕스 일원으로서의 삶, 평범하지 않은 사랑까지 더듬게 되는데 그 중간 중간에 책 내용을 환기하게 된다.

상 조르즈 성이 보이는 곳은 알칸트라 전망대로 알려져 있는데 아마데우의 묘지까지 들른 그레고리우스는 이곳에 와서 책 속 내용을 떠올린다.

 

우리가 지나온 생의 특정한 장소로 갈 때 우리 자신을 향한 여행도 시작된다. 그 여정의 길이는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그 여행에서 외로움과 만나야 한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은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에서 기인하지 않나? 그래서 미리 단념하는 걸까. 인생의 끝에서 후회할 만한 모든 일들을

이 대사는 아마데우의 원고지만 결국 원작자(파스칼 메르시어)와 감독의 의향이 반영된 것이며 영화 전체의 흐름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문구다. 극 중 인물 모두가 이 대사로부터 자유롭지 않으며 이는 스크린 앞의 독자도 마찬가지다. 여행은 바쁜 일상을 핑계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내려두었던 감정에 직면할 좋은 기회다. 외로움도 그렇다. 자신이 애써 행하는 일들이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인가 하는 자각도 필요하다. 자기 안의 그 두려움에 맞서거나 견디며 선택을 고민하는 동력을 준다는 데 여행의 매력이 있다. 물론, 영화 속에선 계획한 대로 살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히면 인생의 진정한 주인공이 될 수 없다는 말을 슬쩍 붙여두긴 했다.

이런 고민 중에 자전거에 부딪친 그레고리우스는 안경알을 깨게 되고 그로 인해 자기 인생에 깊이 개입할 수도 있는 여인을 만난다. 그레고리우스가 기억하는 책 내용과 연결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꼭 요란한 사건만이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결정적 순간이 되는 건 아니다. 실제로 운명이 결정되는 드라마틱한 순간을 믿을 수 없을 만큼 사소할 수 있다.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고 삶에 완전히 새로운 빛을 부여하는 경험은 소리 없이 일어난다

 

안경알을 바꾸어준 여인은 그레고리우스에게 아마데우의 레지스탕스 동료였던 자신의 오빠를 소개시켜 준다. 그레고리우스는 아마데우의 열정에 비해 자신이 너무 보잘것없음을 얘기하고 그의 아내가 그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떠났다고 했지만, 그런 그가 지루하지 않다고 말해주는 여인이다. 영화의 막바지, 여인이 먼저 손을 내밀었고 그레고리우스는 선택해야 한다. 그녀의 손을 잡고 가 보지 못한 모험을 살지, 익숙한 곳으로 돌아갈지. 기차는 다가오고 자막은 올라간다.

 

영화의 배경인 리스본은 1775년 대지진을 겪으면서 페허가 되었다가 복구되었다. 그때부터 4층 이상의 건물을 짓지 못하게 했다. 높은 언덕에서는 어디서나 가릴 것 없이 경치를 보고 바다를 볼 수 있는 행운은 이렇게 생긴 것이다.

대구 경북을 강타하는 코로나의 끝을 짐작하기 어렵지만 더 나은 국면이 조성되는 계기가 되길 바랄 뿐이다. (이동훈)

 

 

뒤에 사진 1장은 20191월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