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시

고산방학도

톰소여와허크 2020. 2. 28. 22:56

고산방학도(孤山放鶴圖)* / 이동훈

 

매화는 늙어야 좋다는데**
어쩌자고, 늙은 매화 줄기 위로
팔소매 넘겨 몸의 무게를 고스란히 받게 하는가.

누군 학을 기다린다고 하고
누군 언덕 아래 기척을 기다린다고 하고
이래저래 기다림에 지친 거라면
고갤 쭉 빼거나 먼 데 눈을 주면 될 것을
학의 접은 목처럼 노인의 굽은 등만 유난한 것은 뭔가.

학 울음도 매화 향기도
무성(無聲) 무취(無臭)에 비할 바 아니라 했으니
이 동산은 오감으로 헤아릴 수 없는 건가.
매화도 늙고, 학도 늙고, 사람도 그만큼 늙어야
가까스로 닿을 수 있는 선계라면
늙은 매화와 한통속이 되어야
등 굽은 세상의 진경 그 입구에 서는 거다.

붓 한 자루 바로 세워
박연폭포처럼 내리뻗던 기세를 간직하고
안으로 안으로 인왕산 능선처럼 굽어진 뒤에야
조용히 깊어지는 세상인 것을.
늙은 나무가 있어
안개도 시시로 살고, 학도 자유로 오가는 것을.

 

* 정선, <고산방학도>. 간송미술관에 한 점 있고, 독일에서 반납 받아 보관 중인 왜관수도원에 한 점 있다. 정경이 비슷하나, 간송미술관 그림에 매화가 한 그루 더 있는데 나무의 그림자로 보기도 한다. 화제에 鳴似聞之, 香似播之, 曷若無聲無臭(울음이 들리는 듯하고 향기가 퍼지는 듯하지만, 소리 없고 냄새 없는 것과 어찌 같겠는가)라고 적혀 있다.

** 김용준, 『근원수필』에서.

 

그림은,
정선, <고산방학도>, 왜관수도원 소장
정선, <박연폭포>, 개인 소장
정선, <인왕제색도>, 1751년,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