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새를 기다리며 / 전봉건

톰소여와허크 2020. 8. 2. 22:20

새를 기다리며 / 전봉건

 

 

화가

이중섭의 그림책에서

제주도의 먼바다나

통영의 비탈진 낮은 마을

그런 것이 보이는 그림 한 장 떼어서

작은 액자에 넣어 걸어놓고

 

낡은 테이프

잡음이 좀 나기는 하지만

바하의 관현악 모음곡 제2B단조

플루트가 나오는 그것

장난감 같은 카세트에

볼륨 너무 크지 않게 돌려놓고

 

그리고 꽃이랑 별이 많이 나오는

만화책 한 권 뒤적이면서 기다리기로 한다

날아온 새 한 마리 파란 새 그 한 마리

내 머리나 손바닥에서

쫑긋

쫑긋거릴 때까지

 

전봉건 시전집(남진우, 문학동네, 2008)

 

 

감상 황동규 시인은 보헤미안의 요소로 자기 파괴, 자유, 댄디즘을 꼽았다. 이상 시인과 김종삼 시인이 꼭 그러했다는 얘기도 보탰다. 댄대즘(dandyism)은 겉으로 멋을 부리는 거다.

김종삼과 전봉래, 전봉건 형제는 특별한 인연의 사람들이다. 김종삼은 전봉래와 벗하며 가까이 지냈으나, 전봉래는 피난지 부산, 스타 다방에서 청백히 살고 싶다는 간단한 유서를 남기고 음독자살했다. 19512월의 일이다.

이후, 피난지 대구에서 전봉건을 만난 김종삼은 레코드를 건넨다. 바하의 <두 개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이다. 밥을 굶어도 음반을 챙기던 김종삼이지만 자신이 보물처럼 여기던 레코드를 자신이 빚진 마음이 있는 사람들에게 곧잘 내주곤 했다. 이런 인연으로 김종삼, 전봉건은 3인 시집을 두 번이나 함께 내게 된다.

위 시의 이중섭을 두고 김종삼은 미사에 참석한 이중섭씨로 애정을 보였으며, 전봉건은 여름에, 가을에, 봄에를 통해 이중섭과 이중섭 그림에 대해 더 각별한 애정을 드러낸다. 생활이 가난해도 좋아할 만한 대상을 좋아하고, 좋아하는 티를 내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어 보인다. 시인은 잡지나 달력 그림에서 중섭의 그림을 오려다가 값싼 액자에 담아 보겠단다. 어쩌면 이런 것이 진정한 댄디의 자세가 아닐까 싶다.

전봉건 시인이 낡은 테이프로 들어보겠다는 바하의 관현악 모음곡 제2B단조는 자신의 형 전봉래가 죽기 전에 들었던 음악이다. 그러니 시인이 기다리는 파란 새는 죽은 형일 수도 있고, 삼팔선 북쪽 고향 땅에 두고 온 그리운 사람일 수도 있겠다.

음악에 무지한 나로선 바하의 음악 대신, “이중섭의 말라비틀어진 닭 한 마리”(가을에)를 보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의 자세를 취해본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