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 생각 3 / 김광림
이중섭 생각 3 / 김광림
팔삭둥이 첫아들이 죽었을 때
그는 곤드레만드레가 되어
죽은 애 또래의 살아있는 애들을
그리고 있었다
저승동무 길동무로
천도(天桃) 따는 애며
맨손으로 물고기 잡는 애들이랑
학 타고 날아다니는 애도
상기도 애비 목 틀어잡는 녀석이며
여직 에미 젖가슴 뒤지는 녀석
오오라 게한테 물린 고추녀석이
제일 늦구나
개구쟁이 코흘리개 오줌싸개 울보랑
모두 모두 모이자
그는 잠자고 붓을 놓았다
그리고 죽은 애 목덜미에
그림을 걸어주었다
십자가보다 더 빛부신 동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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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청한 사내』, 문학사상사, 1988.
감상 : 중섭이 발가락으로 애칭했던 마사코(이남덕)가 중섭을 찾아 현해탄을 넘어온 것은 1945년이다. 이때 이중섭은 평북 정주에서 오산학교를 졸업한 후 함경도 원산에서 터를 잡고 직장을 구하던 중이었다. 원산시 광석동에서 이중섭과 이남덕의 신혼생활이 시작되었고 다음해 태어난 아이는 몇 달을 살지 못하고 죽는다.
이때 이남덕은 서울에 다니러 간 이중섭이 아이 죽을 때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그림을 한 장 남겨두었다고 한다. 아이 죽음이 주는 상실감으로 술을 거하게 마시고 쓰러진 중섭은 새벽에 깨어나자마자 아이가 외롭지 않도록 무덤에 함께 넣어줄 그림을 그렸다. 이중섭보다 열두어 살 아래인 김광림이 무덤에 들어갈 그림을 직접 보았을 거 같진 않다. 이중섭의 원산 집에서 어깨 너머로 보았던 그림의 기억을 이렇게 재생시켜 놓은 것이리라.
사실, 천도(天桃) 따고, 물고기 잡고, 게와 노니는 동화적 장면은 이중섭 그림이나 편지 그림의 단골 소재인데 죽은 아이뿐만 아니라 뒤에 얻게 되는 두 아이를 연상케 하는 그림들이기도 하다. 제주도에서 가족이 함께 생활한 몇 달을 끝으로 이남덕은 생활고를 이기지 못하고 두 아이를 데리고 일본으로 돌아가고 만다. 중섭은 아내와 아이들을 늘 그리워했다. 가족 그림이 유난히 많았던 이유도 가족 간의 추억을 환기하는 그림 작업이 중섭 자신에게도 적잖은 위로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중섭을 추억하는 김광림 시인은 전쟁 통에 장교로 복무하며, 피난지를 전전하는 중섭에게 군대에서 쓰던 은박지를 내주며 은지화 탄생을 도운 인물이다. 이중섭의 전시회를 주선해주며 마지막까지 챙기려 했던 구상 시인도 원산에서 월남해온 인물이다. 이중섭의 조카와 막역한 사이로 지냈다는 소설가 이호철도 원산 사람이다.
이남덕 여사는 제주를 찾았지만 원산은 가지 못했다. 100세가 된 그녀가 원산의 신혼집을 찾고 공동묘지도 찾아서 그때 묻었다는 중섭의 그림(어쩌면 그녀가 그린 아이 초상도 있을 수 있겠다)을 떨리는 손으로 쓸어보면 어떨까, 있을 것 같지 않은 일을 혼자 궁리해본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