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녹향 / 이하석

톰소여와허크 2020. 8. 23. 01:02

녹향 / 이하석

 

 

시인들은 가파른 계단으로,

참호인 듯,

술집 곤도로 올라갔지

그 아래층 녹향은 음악의 산실

 

지금은 대구향토문화관 지하로 옮겨져 있지만,

 

그 때 향촌동 골목 안에 서식했던 녹향족들은

뚱보집과 고바우집과 건너집 등 술집을 끼고 놀았지

 

양명문은 술안주로 시를 써서 명태노래로 내걸렸고,

 

그 술렁이던 음악의 골짜기 헤매던

허만하와 박지수의 젊음

고바우집 안주인의 기둥서방인 박지수는 시장판에서 손금을 봐주어 번 돈으로 음악을 듣고 술을 샀지

 

그 방황하는 운명의 비틀거리는

제 손금의 지도 위에도

바흐 음악은 흘렀지

 

-『향촌동 랩소디, 시와반시, 2019.

 

 

감상: 대구 향촌동은 피난지 문화예술의 중심이었다. 고전음악을 감상하는 공간인 녹향은 1946년부터 이창수의 자택 지하로부터 시작하여 이후 13번의 이사를 거친 끝에 대구향토문화관(대구문학관) 지하에 자리 잡고 명맥을 잇고 있다. 녹향 외에도 피난지 대구에서는 박용찬이 레코드 한 트럭을 싣고 와서 개업한 르네상스 다방이 있었다. 전쟁 통 페허에서 바흐의 음악이 흐르는 공간으로 외신에 소개되기도 했다. 녹향과 르네상스는 구상, 유치환, 최정희, 신동집, 양명문, 마해송, 이중섭, 김동진 등 많은 예술가들에게 위로와 영감을 준 장소다.

이하석 시인은 르네상스의 기억에서 르네상스 다방에서 전봉건이 디제이를 보고 김종삼이 드뷔시 곡을 신청하는 장면을 얘기하기도 한다. 녹향에서 양명문이 쓰고 변훈이 곡을 붙인 명태를 두고 술안주로 시를 썼다는 얘기는 가난한 시인의 안주가 되어도 좋고”, “시가 되어도 좋다명태의 시구와 관련된 표현이다.

뚱보집과 고바우집과 건너집은 정석모, 허만하, 윤장근 등 당시로서는 젊은 작가들이 주로 이용했던 막걸리집으로 알려져 있다. 정석모는 기타 치면서 일본 노래를 곧잘 불렀지만 나중엔 그 이상으로 버스 요금과 막걸리 값을 자주 빌렸다. 허만하는 직장을 부산으로 옮겨가면서 시 잘 쓰는 대표적 의사 시인이 되었고, 윤장근은 대구 문단 인물사(2010)를 쓰면서, 구상, 최태응 등이 대구를 뜨면서 대구는 무더위와 권태만이 충만한 도시로 돌아갔다며 이들의 부재를 아쉬워하기도 했다.

고바우집 기둥서방으로 소개된 박지수는 4.19 이후 혁신 정당인 사회대중당 활동으로 투옥된 경력이 있고 이후 신민당에도 적을 두었다. 요즘 문학에서도 정치에서도 잊히어 가는 느낌이 있는 걸 감안하면, 박지수 시인이 남의 손금을 잘 봤지만 제 손금과 운명에 대해서 그리 신통했을 거 같지는 않다. 향촌동의 운명도 시시각각 기울고 있다. 전지역에 부는 부동산 투기와 아파트 건축 열기가 이쪽 지역도 예외가 아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는 멈추었고 녹향은 이어지고 있지만 이제 바흐 음악은 아파트 시멘트벽을 경계로 한두 사람의 귓속으로만 흐르는 운명인 듯도 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곡과 소리를 남겨놓은 바흐처럼, 몸과 맘에 와 닿았던 것을 어떤 식으로든 풀어서 남겨두는 게 모든 예술가의 운명이다.

향촌동 꽃자리 다방에서 초토의 시(1956) 출간회를 가지기도 했던 구상은 앉은 자리가 꽃자리”(꽃자리)라고 했지만 앉을 자리를 스스로 가꾸는 태도도 필요해 보인다. 어떻게든 향촌동을 기록하고 노래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향촌동 골목골목이 품었던 바흐의 음악도, 양명문의 명태도, 중섭의 은지화도 손금의 지도에서 당장 사라질 거 같지 않다는 게 약간의 위로가 된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