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풍류세시기
이승만, 『풍류세시기(風流歲時記)』, 중앙일보·동양방송, 1977.
이승만(1903-1975)은 화가이면서 삽화가다. 이 책은 이승만이 잡지에 연재했던 생활세시기(生活歲時記)와 과인풍물지(過人風物誌)를 사후에 단행본으로 엮은 것이다. 생활세시기는 잊혀져가는 세시풍속을, 과인풍물지는 주변의 예술한다는 사람들의 특별난 모습들을 소개한 글이다. 중간 중간 화가가 직접 그린 삽화를 곁들이고 있는데 표지화로 뽑힌 이상과 구본웅의 모습이 그중에서도 압권이다.
생활세시기의 한 대목을 보자면, 묵은세배를 모르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며 묵은세배의 의미를 되새길 필요를 얘기한다. “섣달 그믐날 친척집 어른이나 세교(世交-대대로 사귀어온 친분)로 맺어진 집안들을 찾아서 묵은세배를 드리게 된다. 묵은세배의 진의는 오는 정초 설빔에 혹여 형세가 궁색하여 곤란이나 당하지 않는가 하여 두루 그 집안 형세를 눈여겨 살핀 뒤에 곤란한 빛이 보이며 슬며시 얼마간 지니고 온 세의금을 방석 밑에 찔러넣고 물러나오는 것”이라며 이런 풍속이 인정의 다사로움을 느끼게 해준다는 것이다.
이 책의 재미는 저자 이승만이 제일 잘 아는 화가와 문인들 관련 이야기다. 일본 동경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처음 배우고 도입했던 고희동은 서양화 전공 화가의 모임인 ‘고려화회’를 만든다. 여기에 이승만 본인을 비롯해서 장발, 김창섭, 이제창, 안석주, 구본웅, 이재상이 참여한다. 이승만에게 고희동은 휘문고 은사이면서 어려운 사람이었겠지만 이용우에겐 그렇지 않았나 보다. 이용우는 외부 단체가 주최하는 망년회 등에서 화가가 종이에 휘필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는데, 고희동이 휘필하는 것을 보고 그의 수염을 밀어젖히면서 뒤로 자빠뜨린 일이 있다고 했다. 술김에 한 일이다. 고희동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의연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묵로 이용우, 청전 이상범, 심산 노수현은 삼총사로 불리며 술로 자주 어울리며 티격태격 다툼도 많아서 이승만이 중재 역할을 했다고도 한다.(이상범과 노수현은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리는 불명예를 안기도 했다.) 이상범과 이승만은 조강지처를 잃고 두 번 세 번 결혼하는 운명이라든지 전쟁으로 큰아들의 생사를 알지 못한다는 아픔을 쓸쓸하게 공유하고 있다.
이 책에선 술 좀 한다는 나도향, 홍사용, 염상섭의 일면도 확인할 수 있고, 당시 화가들이 이름을 낼 수 있는 무대인 선전(鮮展) 입상자에 대한 꼼꼼한 기록도 볼 수 있다. 무엇보다 표지화 대상인 이상과 구본웅의 외양은 이승만의 눈에도 독특해 보였는지 자세히 묘사해두고 있다. 그 일부를 옮겨둔다.
“이상은 원래 천혜의 보헤미안이었다. 그의 머리는 봉두난발에 평생 빗질은 몰랐고 며칠씩 세수 거르기를 떡 먹듯 했다. 얼굴은 언제 보아도 창백한 것이 핏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데다가 수염은 창대같이 돋아나 마치 중병을 앓은 사람과 같았다. 그리고 일상의 생활을 아예 외면하는 터였다. 그런데 그에게 있어서 그의 입성가짐이 예외일 수는 없었다. 그는 곧잘 보헤미안 넥타이에 양복은 처음 입고서 헤질 때까지 다림질을 몰랐고 겨울철에 백구두 신기는 아마도 이상이 세계에서 최초의 챔피언 영광을 누리지 않았을까 한다. 그는 항시 세상만사가 모두 우스꽝스럽게만 보인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심심치 않을 정도로 난해한 시를 흩뿌리면서도 다니는 괴짜였다.
그때 그와 명콤비인 꼽추인 구본웅이 그와 곧잘 어울렸다. 그는 주로 중산모에 인바네스를 즐겨 입었다. 발은 칠피구두와 구두목을 덮는 캐돌(영국신사들이 상용하는 구두목에 끼어신 게 된 먼지가리 겸한 액세서리 일종)로 단단히 치장을 했다. 그의 이런 차림도 알고 보면 까닭이 있게 마련이다. 그는 선천적으로 꼽추 태생이었다. 그 자신은 한번도 입밖에 낸 일은 없으나 사람들로부터 느끼는 열등감에 대한 무언의 반기를 드는 행위에서 나온 것이리라.”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