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귀신이 산다 / 이명윤

톰소여와허크 2020. 10. 2. 12:54

귀신이 산다 / 이명윤

 

 

야시골 서편 오래된 폐가에

귀신이 산다고 모두들 수군거린다

거뭇거뭇 해가 지면

기이한 울음소리 들려온다며 무서워한다

어릴 적 자주 놀러 간 그 집

내력 잘 아는 나는 슬그머니 웃음이 난다

건넌방에 옛 동무랑 오순도순 누우면

가만히 색동 이불 속 발가락 간질이던

창문 밖 쓱 긴 머리카락 드리우다 밤이면

어둑한 뒷간에 몰래 숨어

두 손 들고 히죽거리던 처녀귀신

허나 벌써 수십 년도 지난 일

지금쯤 무정하게 늙은 그녀만 남았을 텐데

관절에 힘도 없고 머리도 허옇게 세었을 텐데

침침한 저녁 문지방 넘다 소복이 걸려

문짝과 함께 나자빠지진 않았을까

흰 고무신 두 짝 가슴에 안고

기울어진 대청마루에 중얼중얼 앉아 있진 않을까

산짐승 무서워 빈 독에 숨어 뚜껑을 닫고

한 달이 넘도록 꺼이꺼이 울고 있을지도 모르지

, 오늘 같은 밤에 지붕 우에 앉아

아이 추워, 아이 추워, 청승맞게 칭얼대면 어쩌나

가만 생각하니 은근 걱정되는 것인데

샛바람만 불어도 덜덜거리는 무서운 적막

부뚜막 온기가 사라지고 수도도 전기도 끊기고

택배마저 오지 않는 폐가에 남아

 

귀신은 도대체, 저 혼자서

무얼 먹고 살아가나

 

-『수제비 먹으러 가자는 말, 푸른사상사, 2020.

 

 

감상- 귀신 이야기를 소재로 한 드라마 <전설의 고향>엔 팔도의 숱한 귀신이 등장한다. 그만큼 귀신 혹은 귀신에 대한 인식이 일상 깊숙이 작용하고 있었다는 반증일 것이다. 대개 사람이 억울하게 죽으면 원귀가 되어 이승과 저승 사이를 헤맨다고 한다. 원귀는 주변 사람에게 슬쩍 모습을 비추고 때로 무고한 사람까지 해코지하게 되니 놀람과 공포의 대상이다.

원귀 중에 처녀귀신은 결혼을 하지 못하고 억울하게 죽은 혼이다. <전설의 고향>은 일의 자초지종을 밝혀 원한을 풀어주는 일로 끝을 맺는 서사를 갖고 있다. 원한과 그 해결이 불분명하더라도 무당을 불러 굿을 하고 음식을 차려 넋을 위로하는 것이 남은 사람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위의 시에서 시인의 고향이 통영인 것을 감안하면 귀신이 나타난다는 야시골은 미륵산 아랫마을이다. 야시가 대장간을 지칭하는 야소(冶所)에서 나왔다는 얘기도 있지만, 여우가 많이 넘나드는 골이란 말이 더 그럴듯하다. 꼬리 아홉 달린 여우가 무덤 위로 재주넘으면서 예쁜 각시로 변장하는 이야기에 경도된 세대에겐 더욱 그렇겠다.

시인은 어린 시절 친구의 집을 기웃거리던 처녀귀신을 부정하지 않는다. 친구의 죽은 누이일 수도 있고, 이웃집 여자일 수도 있고, 이전에 살던 원귀일 수도 있다. 가까이 발치를 내려다보기도 하고 떨어져서 히죽거리기도 하는 모습은 전혀 위협적이지 않다. 물론, 그 시절의 아이에겐 생시인 듯 아닌 듯 일말의 두려움이 가시지 않았겠지만 그 이후로 시인의 감수성은 그때의 귀신에게 한없이 너그러워진다.

나이가 든 처녀귀신이 관절마저 약해져서 넘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 아무도 찾지 않는 폐가에 혼자 무서워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 불 때지 않아서 춥지 않을까 하는 걱정 등이 그렇다. 귀신의 위용은 어디 갔는지 사라지고, 아무도 돌보지 않아서 쓸쓸히 늙어가는 어머니 모습까지 오버랩될 정도로 인간적이다. 정확히는 귀신이 인간적이라기보다는 그 귀신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이 인간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귀신은 도대체, 저 혼자서

무얼 먹고 살아가나

 

여기에 귀신자리에 다른 누군가를 넣어봐도 문맥은 틀어지지 않고 시인의 뜻은 그대로일 것이다. 귀신을 걱정하는 측은지심이 이웃의 소외된 사람들을 걱정하고 편들어주는 마음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근대 과학이 증명할 수 없는 것을 미신으로 만들어버려서인지 귀신의 위력도 무당의 권위도 떨어졌다. 하지만 사후 세계를 증명할 과학적 지식이 전무한 지금에 귀신에 오싹할 이유가 사라진 건 아니다. , 귀신보단 사람이 더 무섭다는 얘기는 부정하기 어렵다. 또 한편 귀신마저 걱정해주는 마음도 사람의 성정이라 조금은 위로가 된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