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집 / 이기철
그 집 / 이기철
오전 열 시 문 여는 술집이 있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의 주정을 오전 내내 받아주었음 좋겠다
오후 세 시쯤 문 여는 술집이 있으면 좋겠다
술 덜 깬 내 어깨 뒤로 맛있는 안주를 주면 좋겠다
노을이 갓 지기 시작하면
흐릿한 주막이나 포차 하나 있으면 좋겠다
그래서 그래서,
맑은 소주 한잔 꿈처럼 놓고
잠들었음 좋겠다
- 『별책부록』, 디자인 협진, 2016.
감상 : 시인에게 별책부록은 “예기치 못했던 밤, 별똥별”(「별책부록」)처럼 뜻하지 않은 선물이다. 읽으려고 했던 책을 다 읽고, 무심코 딸려온 책을 펴다가 코를 박게 되는 일이 없지 않다. 시인은 자신의 책이 그렇게 읽히기를 원한다. 사람과의 만남도 예기치 못한 곳에서 만나 밤하늘처럼 은은하거나 별똥 보듯 환해지는 사이도 있을 것이다.
별책부록은 책이름답게 시집이면서 산문이 선물로 들어 있다. 시 「그 집」만 보면 술 냄새 나는 산문일 거 같지만 울산서점협동조합 이사라는 명칭에 맞게 온통 서점과 책 이야기이긴 하다. 표지 날개 한 쪽은 표지그림 <몽환의 숲>을 그린 김주영 화가의 자리다. 이파리 하나하나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그림이다. 이쪽에서 건너가는 시선도 평화롭다. 화가와, 화가 그림을 시집에 앉힌 시인이 주변을 어떻게 의식하는지 말해주는 듯하다.
시인이 찾는 「그 집」 속으로 들어가면 아침부터 술이다. 이즈음의 코로나 정국에 야간 영업이 어려운 가게에서 낮술 손님을 환영한다는 광고를 봤지만 시인은 더 파격적으로 해장을 겸한 아침 술이다. 술주정을 미안해하지 않고 안주도 가려 가며서 낮술 지나 저녁 술까지 이어가는, 시인의 하루는 삼시 술술술이다. 잠들 때도 술 한 잔 모시는 정성은 일급 주당파의 한 경지로 손색없다.
사실 산문에서 마주하는 시인은 책 읽고, 해야 할 일을 구상하느라 바쁜 걸 보면 저 높은 술의 경지는 희망사항에 가깝다. 술의 위로가 없으면 살기 힘든 각박한 사람살이를 대신 노래해 준 것일 수도 있겠다. 술시로 언급한 오전 열 시, 오후 세 시, 노을 질 무렵을 인생의 한 시기로 생각하더라도 어느 때고 삶의 위로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더 분명해질 뿐이다. 술집에서 남이 사주지 않는 술은, 자기 집에서 스스로에게 대접하는 방법도 있지만 문제는 체력이다. 삼시라도 작은 잔으로 한 잔씩 아껴 먹는다면 오래 위로받지 않을까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 집」을 따라 읽으면서 “오가며 그 집 앞을 지나노라면/ 그리워 나도 몰래 발이 머물고”(이은상 시, 현제명 작곡 <그 집 앞>,1933)란 노랫가락이 연상되는 건 제목의 유사성 때문일 것이다. 가곡의 그 집은 사랑하는 연인의 집이고 시인이 찾는 그 집은 술집이니 어마한 차이가 있을 것이지만 묘하게도 발길이 가 닿고 싶은 곳이란 점은 다르지 않다. 양미리가 익어가는 술집에서 딱 한 잔 마시면 좋겠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