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집> 빈 하늘에 걸린 빨랫줄 하나
변영림, 『빈 하늘에 걸린 빨랫줄 하나』, 북인, 2006.
저자인 변영림은 정진규 시인의 아내다. 크리스마스 이브 쌀독이 비었을 때, 원고료로 쌀을 사오겠다고 나선 남편이 술이 억병으로 취해서 새벽에 돌아왔는데 가방엔 쌀 대신 책만 가득하더라며 한때의 정진규를 기록해둔다.
남편이 고향 안성에 집을 짓겠다며 원하는 집을 물어왔을 때 변영림은 이렇게 쪽지로 답한다.
<빈 하늘에 걸린 빨랫줄 하나와
원추리, 채송화가 둘러져 피어 있는 장독대가 있는 집
그리고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집>
이 요구도 쉽지 않은 것을 느낄 무렵, 변영림의 쪽지는 다른, 멋진 집으로 돌아온다. 정진규의 시다.
빈 하늘에 걸린 빨랫줄 / 정진규
남들도 다 그런다하기 새 집 한 채를 고향에 마련할 요량으로 그림을 그려가다가 늙은 아내도 동참시켜 원하는 걸 그려보라 했더니 빈 하늘에 걸린 빨랫줄 하나와 원추리랑 채송화가 피는 장독대가 있는 집이면 되었다고 했다. 남들이 탐하지 않도록 눈에 뜨이지 않게만 하라고 한 마디를 덧붙였다. 실용(實用)도 끝이 있구나! 나는 놀랐다. 내 텅빈 실용 때문에 텅빈을 채우느라고 육십 평생을 소진했구나 아내의 실용이 바뀌었구나 눈물이 한참 났다. 이제서야 사람 노릇 좀 한 번 하려고 실용 한 번 하려고 나는 실용의 그림들을 잔뜩 그려 넣었는데 없는 실용의 실용을 아내가 터득했구나 눈에 뜨이지 않게까지 알아버리다니 다 지웠구나 나는 아직 그냥그탕인데 마침내 일자무식으로 빈 하늘에 걸린 아내의 빨랫줄이여! 구름도 탁탁 물기 털어 제 몸 내다 말리는구나 염치없음이여, 조금 짐작하기 시작한 나의 일자무식도 거기 가서 잠깐 잠시 끼어들었다 염치없음이여, 또 다시 끼어드는 나의 일생이여 원추리 핀다 채송화 핀다. (2003)
변영림은 이 시에 대해 더 언급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아름다운 시의 집이다. 시인이 가장으로서 실용을 채우지 못하면서 아내가 다른 실용으로 나아갔다는 것인데 아내가 그렇게 된 것은 염치없게도 시인 자신의 탓이기도 하지만 또 달리 생각하면 자신이 실천하지 못하면서도 진작부터 바라던 것을 아내가 대신 얘기해주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각자 꾸는 꿈이 함께 꾸는 꿈으로 바뀌게 된 것이니 설령 세속적 실용은 멀어졌어도 “원추리 핀다 채송화 핀다”는 결구가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이다.
산문집 『빈 하늘에 걸린 빨랫줄 하나』는 변영림이 어머니의 딸로, 정진규의 아내로, 세 자녀의 어머니로, 시부모의 며느리로, 중학교 교사로 어떻게 지내왔는지 그 과정에 마음이 쓰이던 일들과 소소한 깨우침에 대해서 잔잔하게 들려준다.
변영림은 30년 가까이 살았다는 수유리에서 화계사에 종종 들린다. 한번은 절집에서 어딘가 문병 다녀온 듯한 손님이 남의 흉을 보는 것을 속으로 탓하다가 깜짝 놀란다. 자신이 남의 흉을 똑같이 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전쟁통에 남편을 잃은 변영림의 어머니는 미군 팬티 두 장으로 여자 블라우스 한 장을 만드는 일을 시작으로 아동복 도매상에 나서 오남매를 키웠다. 나이 들어서도 무엇이든 만들어 주변에 나누어주기를 좋아했던 어머니를 떠올리며 변영림은 “우리 형제들은 가끔 우리들이 어머니만 하지 못한 것을 한탄하고 어머니께 죄송해 한다. 우리는 우리 자손들이 어머니를 닮기를 바라고 어머니의 피가 흐르기를 원한다”고 적어둔다.
변영림은 오늘, 지금, 이 마음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끝으로 그녀의 일과표 쓰기를 소개해둔다.
<첫째 칸에 날짜와 요일을 쓴다.
둘째 칸에 이미 정해진 행사나 약속, 잊어서는 안 될 일을 기록한다.
셋째 칸 넓은 곳에 그날 해야 할 일, 생각해 두어야 할 것 등을 적는다.
계획했지만 안 했거나 못했을 때는 이유를 적어 넣는다.
그밖의 여백에 느낌, 생각, 좀 더 뒷날을 위한 계획, 바람 등을 적는다.
무슨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위하여 일로 정진해야 하는 나이가 아닌, 지금의 나로서 오늘 하루 그냥 허송하는 허망한 기분을 덜어주고 오늘을 닦아가는 삶에 조금은 보탬이 될 거 같아서다>
간단하지만 이러한 기록과 성찰이 변영림의 말대로 자신과 주변의 조금 더 나은 삶에 영향을 주리라 생각한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