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노주점 / 김종문

톰소여와허크 2021. 1. 30. 00:40

노주점(露酒店) / 김종문

 

 

카아바이드 램프 주위에 떠도는 하루살이 떼

한놈 낙하하여 술잔에 뜬다.

인생이란 오말 하이얌의 시,

인간의 실체는 아무데도 없고, 그저

취중왕생(醉中往生)만이 단 하나의 건강법, 아니면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영원한 수면(睡眠)만이 절대의 행운.

밑창 난 술잔, 세계의 술은 말랐소이오니까

박코소, 나의 전능의 신이여!

다시 기우리는 술병은 피사의 사탑.

늘어지는 취객들, 안팎이 굳어지는 무생물인가

기대는 대화는 꼬마들이 쓰다버리는 석고부스러기,

가자! 이상기후의 서울의 여름밤, 어둠의 거리를

Quo Vadis Domine?

 

- 신시집, 계명문화사, 1965.

 

 

감상 김종문 시인은 한국현대시인협회장을 역임하며 시단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지만, 요즘은 동생 김종삼의 형으로 언급되는 경우가 잦다. 형제는 사이가 좋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종삼이 형을 따라 일본으로 유학을 갔고, 군인이 된 형의 관사에 머물기도 했다. 정훈국장을 역임하고 육군 소장으로 예편한 형은 음악을 좋아하는 동생이 국방부 정훈국에서 방송 음악 담당으로 근무할 수 있게끔 뒤를 봐주었다. 나중에 김종삼이 동아방송으로 옮겨가며 온통 음악 속에 지낼 수 있도록 단초를 놓아준 인물인 셈이다. 김종삼이 아내를 만나는 데도 김종문이 다리를 놓아주었으니 형제간 정이 없다고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둘의 관계가 편치 않은 면이 있다면 김종삼의 무절제한 생활이 빌미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평생 셋방을 전전하는 가운데도 김종삼이 직장에서 번 돈은 번번이 샜다. 집세나 학비 마련에 늘 쪼들리면서도 정작 자신은 멋 부리고 기분 내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염문설도 없지 않았다. 형은 동생의 그런 모습이 못마땅했을 것이고, 동생은 형의 간섭이나 잔소리가 듣기 싫었을 것이다.

두 형제는 닮은 점도 꽤나 많아 보인다. 등산과 술과 담배와 모자를 좋아하고, 실향 의식을 갖고 있고, 무엇보다 시를 고민하고 시를 쓰는 생활을 했다. 위의 노주점(露酒店)은 김종문도 어지간히 술을 좋아했음을 짐작케 하는 시다. 노주점의 노는 이슬이란 뜻이니 번듯한 술집이 아니라 서민이 한데서 적은 돈으로 술병을 기울이는 곳이다. 술집에 모인 사람들은 벅적거리다가도 하루의 노동에 지쳐서 점점 바닥으로 기울어져간다. 술잔에 떨어지는 하루살이의 운명도 이와 같을 것이다.

인생이란 오말 하이얌의 시라고 툭 던져놓은 대목은 김종삼을 보는 듯하다. 애써 말하지 않음으로써 긴장을 갖게 하고 숨겨진 의도를 독자 스스로 생각하게 한다. 천 년 전의 하이얌은 이렇게 말한다.

 

아니 묻지도 않고, 어디에서 여기로 서둘러 왔는가?

, 묻지도 않고, 여기에서 어디로 서둘러 갔단 말인가!

한 잔 또 한 잔 쭉 들이켜

이 얼토당토않은 일을 까맣게 잊자꾸나!

 

루바이야트(피츠제럴드 번역 / 윤준 옮김)에 나오는 오마르 하이얌의 시구처럼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정말 모를 일이다. 구멍가게에서 소주를 훔쳐서라도 극형 같은 현실을 견디려 했던 김종삼의 비장함까지는 아니더라도 형 김종문 역시 도무지 답이 있을 거 같지 않은 현실을 버려두고 술병만 쓰러뜨리는 분위기다. 주고받는 대화도 딱딱하게 굳어서 석고부스러기처럼 떨어질 즈음, “가자!”란 말 한 마디만 소망스럽게 들린다. “이상기후의 서울의 여름밤은 그때보다 지금에 더 어울리는 말이 되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직장을 또 술집을 나와서 자신의 걸음이 어디로 향해 가야 할지 막막해하며 멈칫할 때가 왜 없겠는가.

광화문 아리스 다방과 인근 술집을 오가던 김종삼도 김종문도 다른 세상으로 갔다. 인생이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어도 술 한 잔의 위로로 얼토당토않은 일들을 잠시 밀쳐놓는 술꾼 시인들의 건강법을 배운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