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얼굴 / 이민호
시인의 얼굴
박용래 / 이민호
용래는 깊은 산속 소금종지다
귀하디귀한 눈물을 담고 있어
그를 보지 못할 지라도
생각이 말라 목이 마를 때면
그 쪽에 머리 두기만 해도 순한 양이 된다
마음이 몹시 서러운
짐승이 된다
종삼과 함께 우리에게 더 이상 시인은 없다
- 『피의 고현학』, 애지, 2011.
감상 - 생각이 이어져야 말이 되고 글이 된다. 시 한 편은 생각의 농도가 더 진해야 한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다르게 생각하고, 다음에 또 생각하는 그런 생각의 줄다리기 끝에 말문이 열릴 때를 기다려야 한다. 이민호 시인은 생각이 마를 때 박용래에게 기댄다. 박용래를 읽으면 마음이 순해지고 목마름에 물기를 준다는 것이다.
박용래는 20일 금주라는 기록을 세워놓고 그 전후에 술을 마시지 않은 날이 없었고, 술을 마시면 울지 않은 날이 없었다고 이문구는 ‘박용래 약전’에 밝히고 있다. 매일의 금주 선언으로 아침에 술잔을 부수면 저녁에 종지에 술을 담아 마시던 박용래건만 이민호는 그 종지에서 술 대신 소금기를 느낀다. 변두리 빈터(「저녁 눈」)만 찾아다니던 박용래의 생각과 시편이 소금의 결정(結晶)이라면 박용래는 눈물로 소금을 내리는 시인이다.
생각이 마를 때 이민호가 기대는 또 한 명의 시인은 김종삼이다. 「시인의 얼굴 – 김종삼」편에선 김종삼을 자신의 어깨를 찍어 누르던 한 마리 독수리에 빗댄다. 김종삼은 시인을 자처하지 않고 시장에서 고생스럽게 살며 인정을 내는 사람들이 곧 시인이라고 적기도 했다. 김종삼을 따르고 싶은 이민호는 『김종삼 정집』 출간을 주도하고 김종삼 시를 빌린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박용래와 김종삼은 얼핏 결이 달라 보이지만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것에 관심을 두고 시로 형상화한 점이 눈에 띈다. 또한 두 시인은 탁주와 소주로 기호만 갈렸을 뿐 술을 마시지 않는 날이 드물었다. 무엇보다 시에서만큼은, 말을 아끼기 위해서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순도 높은 시를 썼다는 평을 받고 있다. 두 사람 말고는 시인이 없다고 했던 이민호는 이후로도 「시인의 얼굴」을 계속 쓰고 있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