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책)

<소설> 모비 딕

톰소여와허크 2021. 6. 17. 21:42

허먼 멜빌(김석희 역), 『모비 딕』, 작가정신, 2011.


아마도 계림출판사 명작문고판으로 읽었을 『보물섬』의 실버 선장, 『백경』의 에이해브 선장은 외다리란 공통점과 함께 카리스마 넘치는 강인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 실버 선장이 외다리가 된 이유는 떠오르지 않지만, 에이해브는 모비 딕을 잡으려다가 도리어 자신의 다리 하나를 바쳐야 했고 이후 복수심으로 모비 딕을 추적한다.
지금은 『백경』 대신 『모비 딕』으로 더 많이 소개되는 소설은 모험심을 되살아나게 해준다. 완역본을 새로 읽으니 소싯적에 느꼈을 긴장은 다소 풀렸을지 모르나 항구, 배, 뱃사람, 바다, 고래를 둘러싼 흥미진진한 서사 속에 표현의 묘미를 느끼게 해주는 문장들이 많아서 두꺼운 책이 전혀 지루하지 않다.
선장 에이해브가 모비 딕과의 사투에 모든 걸 건 광기의 남자라면, 일등 항해사 스타벅은 어떻게 하든 항구로 무사귀환해서 고래 기름을 돈으로 바꾸어 가족을 건사하려는 현실주의자다. 스타벅스 사장은 스타벅을 커피점 상호로 내세울 만큼 좋아했을지 모르지만 내게 가장 매력적인 이름은 이슈메일의 눈에 비친 작살잡이 퀴퀘그다. 퀴퀘그는 남태평양 섬의 식인 부족 출신이다. 물보라여인숙에서 작살의 날을 부츠에 문질러 날을 벼리고 그걸로 면도하는 남자니 반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슈메일과는 도끼 파이프로 사교 담배를 나누어 피운 뒤 친구가 된다. 이슈메일과 퀴퀘그가 인근 식당에서 먹은 조개탕에 대해선, “그것은 개암열매만큼 작지만 즙이 많은 조개를 삶아서, 비스킷 가루와 소금에 절여서 얇게 썬 돼지고기를 섞고, 버터를 넣어 풍미를 더한 다음 소금과 후추로 간을 맞춘 요리”라고 하니, 생선살이 주재료인 차우더와 함께 이 지역(낸터컷) 관광지 먹거리 1번으로 내세울 만하다. 낸터컷이 자본주의 도심이라면 그러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겠다.
고래 해체 작업 중 안전을 위해서 서로의 허리를 밧줄로 묶은 이슈메일과 퀴퀘그는 생사를 같이하는 운명공동체일 거란 상상을 하게 되지만 결론적으로 생사는 갈리고 만다. 죽어가는 퀴퀘그를 위해 미리 짜놓은 관은 퀴퀘그의 회복으로 구명부표로 용도가 바뀌고, 그 구명부표는 모비 딕을 쫓다가 침몰하는 피쿼드호의 선원 중에 단 한 사람의 목숨만 구한다. 방대한 고래 공부에 지치지 않는다면 이처럼 치밀하게 짜여진 서사에도 박수를 보내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다.
고래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보트에 태우지 않겠다고 했던 스타벅은 세월을 건너뛰어 두려움 없이 커피 판매고를 올리고 있다. 포기를 모르는 불굴의 에이해브의 이미지도 누군가 차용하고 있을 것이다. 검은 피부와 식인 이미지 덕에 퀴퀘그는 가게 상호에 적당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이런 생각도 편견일 것이다. 모비 딕을 읽는 동안, 바람은 평등하게 돛폭을 부풀리고, 빈 가슴에 모험심을 불어넣는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