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가족과 안성탕면 / 이철
고양이 가족과 안성탕면 / 이철
새끼 고양이 두 마리가 어미 고양이를 따르고 있었다
십수 년 산 이 동네에서 처음 보는 가족이었다
어느 집 지붕 밑에 세 들어 사는지
지아비는 어디로 돈 벌러 갔는지
아무 정보도 알 수 없는 어미 고양이를
별소리 없이 따르고 있었다 그런 다음 날,
전봇대 급구(急求)를 메모하던
나를 보자 어미 고양이가 곧장 따라왔다
별말 없이 따라왔다
모퉁이를 돌면 같이 돌고
뒤돌아보면 저도 새끼들을 돌아보면서 따라왔다
그렇게 어느새 당도한 셋집
하는 수 없어 안성탕면 두 개를 끓여
몇 가락 던져주니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먹고 있다
나에게도 저토록 간절한 눈빛들이 있었다
-『단풍 콩잎 가족』, 푸른사상사, 2020.
감상 : 세 끼 굶으면 군자가 없다는 말도 있고, 사흘 굶어 담 아니 넘을 놈 없다는 말도 있다. 최소한의 도덕도 최소한의 기본 소득과 그로 인한 생활 안전망 구축 위에 있다는 말로 듣게 된다. 절박한 생계 문제에 직면하면 체면과 도리를 내세우기 어렵고, 자신에게 기대는 가족에겐 더욱 면목이 서지 않는다. 가난이 자신의 탓만은 아닐 거라고 항변하고 싶어도 당장의 소용에 닿지 않으니 “별소리”, “별말” 없이 따르게 된다.
셋집에 살면서 전봇대에 붙은 구직 안내문을 살피는 화자도 실업의 신세로 보인다. 그런 화자를 따르는 어미 고양이는 어떤가. 가장을 대신해서 새끼를 건사하기 위해 낯선 사람을 따르는 위험을 감수하고 다행히 얻어걸린 안성탕면으로 한때의 허기를 잊는다는 것이다. 자기 집을 갖지 못하고, 실업 등으로 전세도 빼고 월세도 밀리는 가족이나, 길거리의 삶을 아슬아슬하게 이어가는 고양이 가족이나 다 같이 삶의 벼랑으로 몰리고 있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그럼에도 이 시엔 따스함이 없지 않다. 배고픈 고양이에게 자신이 먹는 라면을 내어주는 마음이 그렇다. 나눌 줄 모르는 얌체 부자보다 자신의 것을 기꺼이 나누려는 가난과 인정이 훨씬 아름답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안성탕면이라는 라면 상호에 대해선 개인마다 기호가 있겠지만 ‘정’으로 배부른 세상을 꿈꾸는, 가난한 시절의, 오래되고 안성맞춤 격인 이름을 고민했을 것이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