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옛날에는 금잔디 / 문형렬

톰소여와허크 2021. 7. 16. 23:05

옛날에는 금잔디 / 문형렬

 

 

어릴 때는 괴롭지 않았다.

해질녘, 감나무 가지에 올라

마을 밖으로 달아나는 해처럼 그때는

까닭 없이 기다렸다

 

어릴 때는 몰랐다.

어찌 기다려야 하는지.

시간이 가슴을 밟고 지나가도 아픈 줄을 몰랐다.

그때는 정말 왜, 오지 않는가도. , 기다리는가도.

묻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그때의 감나무 가지보다 더욱 높은

서른 살에 올라

나는 물었다.

, 기다리는지. , 오지 않는지.

그리고 혼자 말했다. 메아리처럼,

다시는 내려올 수 없는 희망의 가지에 서서.

 

아무도 오지 않는다.

나는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

 

 

-『꿈에 보는 폭설, 북인, 2020(1990 복간개정판).

 

 

감상 금잔디에서 가신 임 무덤가에 금잔디”( 김소월, 금잔디)가 우선 생각난다. 잔디가 암만 봄빛을 띠고 살아나도 임은 돌아오지 못한다. “옛날에 금잔디 동산에 매기 같이 앉아서 놀던 곳-”으로 시작되는 번안곡 <매기의 추억>도 떠올려 볼 수 있다. 존슨이 죽은 아내 매기를 생각하며 쓴 시 When You And I Were Young Maggie에 버터필드가 곡을 붙인 것이다. 원 시에 등장하는 제비꽃과 수선화는 번안 과정에 금잔디로 바뀌었다. 소월의 금잔디에 보였던 상실감과 어떤 연관이 있었을 듯도 하다.

<매기의 추억> 가사를 시 제목으로 차용한 듯한 문형렬의 시는 옛날에 금잔디대신에 옛날에는 금잔디로 조사 하나를 더해 의미에 차이를 만든다. 단순한 과거가 아닌, 과거에는 어떠어떠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뉘앙스를 풍기게끔 한다.

다만, 과거와 현재가 좋고 나쁨으로 단순하게 구별되지 않는 데서 시의 애매함과 깊이가 더해진다. 어릴 때는 괴롭지 않았다고 했으나 만족의 상태는 더욱 아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부조리극 <고도를 기다리며>의 고도처럼 이유도 없이 의문도 없이 무작정 기다린다. 어떤 결핍, 어떤 상실이 시인의 유년에 놓여있든지 간에 순수한 기다림은 오히려 그러한 감정에 깊게 빠지지 않도록 막아준다.

서른을 지난 시인에게 기다림은 계속된다. 기다림의 이유와 그 기다림이 오기는 할 것인지에 대해 묻고 의심하기 시작하면서 예전의 순수한 기다림의 자세는 아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기다림을 내려놓을 수도 없다. 아무도 오지 않는 걸 알면서도, 더는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것을 알면서도 기다림의 시늉을 그만둘 수 없다. “다시는 내려올 수 없는 희망의 가지에서 그저 기다림을 사는 것만이 희망이고 또한 희망고문이 되었다. 서른에서 다시 한 세대를 더 지난 시인에게 기다림은 어떤 의미인지 들으려면 그의 다른 작품을 보는 성의를 내어야 할 것이다.

꿈이나 기다림이 끝내 실현되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남는다면 기다림의 실현 여부보다 아름다웠던 시절을 저장해두고 누구의 시처럼 기다림의 자세만 생각하는 것도 괜찮아 보인다. 존슨의 시에 반복되는 후렴구를 옮겨적는다. “When I first said I loved only you, Maggie / And you said You loved only me”.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