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안녕 / 박숙경
다만 안녕 / 박숙경
나를 스쳤던 바람이거나
내가 떠나보낸 구름이거나
모두 안녕
나에게서 멀어져간 산맥이거나
나를 떠나버린 작은 집이거나
다만 안녕
나를 밀쳐낸 시간과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던 날들과
무수한 안녕을 고한 후에야
비로소 안녕이 되는
일출과
일몰 사이 모든 경계들도 안녕
문틈으로 새어드는 소문과
빚쟁이처럼 드러눕는 불면도
영원히 안녕
착한 외계인을 만날 거라는 오늘의 운세도
이젠 안녕
- 『그 세계의 말은 다정하기도 해서』, 문학의전당, 2021.
감상 - ‘안녕’이란 말은 명사이기도 하고 감탄사이기도 하다. 명사일 때는 아무 탈 없이 편안하다는 뜻으로, 감탄사일 때는 만나거나 헤어질 때 정답게 하는 인사말로 쓰인다. 인사말에 쓰이는 그 정다운 느낌을 명사로 담을 수 없어서 굳이 감탄사로 따로 구분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시인의 ‘안녕’ 중에 “나를 밀쳐낸 시간”과의 안녕은, 과거 어느 한때에 머물지 못하게 하는, 누구에게든 공평한 시간의 흐름을 말하는 것이겠지만 독자에 따라서는 자신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시간으로부터 떠나왔다는, 그때는 심각했지만 지금은 안도하는 그런 안녕으로 읽을 수도 있겠다.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던 날들”과의 안녕을 말하는 대목에선 시인과 독자의 공감대가 더욱 높아질 것이다.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는 것을 다르게 읽으면,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에게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바람과도 같은 것일 텐데 현실은 어떤가. 재미나지 않는 매일의 노동, 불편한 관계와 일상의 피로, 그럼에도 다른 선택지를 갖기 어려운 주변 여건 등이 맞물려 다들 복잡한 속내 속에 있지 않나. 안녕하지 못한 현실에 누구든 안녕을 고하고 싶겠지만 당장의 필요가 발목을 잡는 식이다.
그럼에도 안녕이란 말은 주체의 의지가 작용하는 말이다. 시인은 착한 외계인을 만날 거라는 오늘의 운수를 소개한다. ‘귀인’이 들어갈 자리에 그런 귀인이 지구엔 좀처럼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는지 ‘외계인’이라는 말로 바꾸어 놓았다. 결론은 그런 오늘의 운수도 이젠 안녕이란 거다. 내 안녕은 내가 쓰는 것이니까.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