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초장의 기억 / 박상봉
푸른 초장의 기억 / 박상봉
미운 일곱 살 물에 빠졌다
어느 여름날 더위 씻으러 물가 갔다가
헤엄도 못 치는 기 멱 감으러 물 안 들어갔다가
바닥 모를 깊은 곳으로 까마득하게 발을 내려놓았다
멀리서 형아의 울부짖는 몸짓 눈앞에서 금방 지워지고
발이 닿지 않는 물의 바닥 세상이 물 밖으로 점점 멀어져 갔다
온갖 슬픔과 기쁨의 일, 물거품 일어났다 사라지고
물속은 푸른빛 하나 없이 검으나 희었다
아무리 발버둥이쳐도 벗어날 수 없는 절벽
질긴 밧줄에 꽁꽁꽁 묶여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그렇게 벌써 오래전에 나는 죽었는데
죽은 몸으로 반세기를 더 살고 있다
지금 사는 세상이 물속인지 물 바깥인지 잘 모르겠다
일곱 살에 지치고 뛰어놀던 푸르른 초장은 지금 어디 있나
처음 것들은 다 지나갔다 물 위에 남은 것은 자색 옷을 입었다
언제나 하늘은, 높이 떠받들려진 하늘은 백옥 같은 말씀이다
- 『불탄 나무의 속사임』, 곰곰나루, 2021.
감상 – 연간 사망자 통계치를 찾다 보니, 코로나19 사망자 수와 산업재해 사망자 수가 비슷하다. 코로나19는 매일 매시간 방송되고 패널을 불러 관련 얘기를 듣는 데 반해서 산업재해 보도는 보도 횟수와 보도 시간이 짧다. 산업재해의 세 배 사망률을 갖고 있는 건 교통사고 사망자 수다. 교통사고의 세 배 사망률을 갖고 있는 건 자살이다. 코로나19 대비도 좋지만 그만큼 산업재해를 줄이는 고민도 해야 하고, 그 이상으로 교통사고와 자살에 대한 대비책이 있어야 할 것을 통계치가 알려준다.
예전엔 어땠을까. 호환(호랑이에게 당하는 화)과 마마(전염병)에 대한 두려움이 커서 대응책 마련에 고심한 기록들이 있고, 수해 피해나 익사 사고도 흔한 일이었다. 점집 사주를 내세워 물 가까이 가지 마라는 얘기도 자주 듣게 된다. 그렇게 해서 경계심을 갖고 조심성이 는다고 하더라도 물놀이 사망의 통계치에 갑작스런 변화가 있었을 성싶지 않다.
박상봉 시인은 하마터면 통계치에 잡힐 뻔하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시인은 1985년부터 수년 간 대구에서 시인다방을 운영하여 시인의 살림방 역할을 하며 시인과 독자의 만남을 꾸준히 기획해왔던 이력이 있다. 죽음에서 돌아온 그의 두 번째 삶으로부터 지역 문예부흥의 역사가 써진 셈이다.
시인은 죽음 체험 이후, 자신이 사는 곳이 물속인지 물 바깥인지 묻는다. 지금의 삶은 실제가 맞는가? 이렇게 저렇게 말할 자유는 있지만 ‘이전’과 ‘이후’를 모르는 상태에서 ‘지금’만 실제라고 우기는 것도 미심쩍긴 하다. 그런 중에 시인의 눈은 과거를 향해, 마음껏 뛰놀던 푸른 풀밭의 기억을 불러온다. 풀밭 대신 굳이 초장이란 표현을 쓴 것은 푸른 초장이 구약성서 시편 번역 과정에 사용된 표현이란 것과 관련 있어 보인다.
시편 23편,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도다>는 구절이 그렇다. 그러고 보니, 자색 옷을 입었다는 것도, 로마 군인이 예수를 조롱하기 위해 가시면류관을 씌우고 자색 옷을 입혔다고 하는 구절을 연상케 한다. 생사 고비를 넘기며 고난과 우여곡절을 겪는 과정이 절대자의 사랑 속에 있음을 믿고 싶었던 것일까? 코로나19, 산업재해, 교통사고, 자살, 수중 사고… 아무도 인도하지 않고 누구도 안녕하지 못한 시대에 빈 하늘만 쳐다보게 된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