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그림자 왕릉에 서다 / 한영채

톰소여와허크 2021. 9. 17. 00:53

그림자 왕릉에 서다

-진평왕릉 / 한영채

 

 

왕릉 입구 젊은 혈기들

오후 네 시 라틴음악이 곡선을 울린다

 

왕조의 그림자 따라온 여기

남동으로 길어진 숨은 그림자는 햇살 아래 미끄러지고

 

흔들리는 물버들 이파리 비비는 소리

바람결에 낭산을 돌고 있다

 

어느 곳에서 덕만을 부르는

진평의 낮은 목소리가

왕릉 위에 나무 그림자로 선다

 

어스름 배웅 길 선도산 아래 오랜 곡선들

무리 지은 갈대 쓸쓸한 손짓이다

 

팔짱 낀 그가 고개 숙여 걷는다

그림자는 천천히 해넘이를 본다

 

모나크 나비처럼, 한국문연, 2021.

 

 

감상 경주 지도를 볼 것 같으면, 반월성을 중심으로 서편에 선도산(서악)이 있고, 동편에 낭산이 있다. 그 아래 남쪽으론 남산이 평지를 품듯이 있다. 서악 고분군엔 진흥왕릉, 진지왕릉, 무열왕릉이 있고, 낭산 쪽엔 선덕여왕릉을 비롯해서 신문왕릉, 효공왕릉이 있다. 낭산에서 내려와 들판에 들어서는 초입에 진평왕릉이 있다. 진평왕은 진흥왕의 손자이고 선덕여왕 덕만의 아버지다.

선덕여왕은 도리천에 해당하는 낭산에 자신의 능을 쓸 것을 미리 말해두었는데, 불심으로 신라를 지키려는 의도가 있어서 그럴 수도 있고, 자신의 재위 기간에 완성된 첨성대, 황룡사, 분황사를 내다보는 명당자리여서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한영채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또 다른 이유가 있을 거란 심증이 뚜렷해진다. 아버지 진평왕이 보이는 자리에 가고 싶은 마음이 가장 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현재 진평왕릉은 국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들판에 있지만 고즈넉한 느낌을 간직하고 있다. 수백 수령의 왕버들이 인상적인데 그 위로 바람이 지나고 이파리가 부딪히며 내는 소리를 듣던 시인은 그 소리를 진평왕과 선덕여왕이 나누는 대화로 듣는다. 바람은 낭산에서 들로, 들에서 낭산으로 오가면 둘의 대화를 잇고 있고, 한 번쯤 저 멀리 선도산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도 이들의 대화를 끊고 몇 마디 섞다가 남산 쪽이든 어디든 휘돌아 나갈 것이다.

진평왕릉에서 남산 쪽으로 돌아서면 탑곡마애불상군과 옥룡사지가 인근에 있고, 거기서 숲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불곡마애여래좌상이 나온다. 일명, 할매 부처로 부르기도 하지만 나이를 종잡기 어려운 오묘하고 그윽한 미소를 갖고 있다. 선덕여왕을 모델로 했다는 얘기도 있다. 실체가 분명하고 사실관계가 명확한 것도 좋지만 모호한 것은 모호한 대로, 수상한 것은 수상한 대로 두고 그림자로 스러지는 것들을 가만히 지켜보는 시간도 충분히 좋을 것이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