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리오 / 박구미
가시리오 / 박구미
가시리오.
대문 활짝 열고 들어가셔서
이 방 저 방 둘러보시고
앞마당에 장독대랑 기염나무도 쓰다듬어 보시고
뒷마당에 모란이랑 앵두나무에 싹이 튼 것도 보시고
버스 지나가는 신작로도 쳐다보시고
오랜만에 마을 회관에 가셔서
동네 어르신들과 인사도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고
동산 모퉁이 가는 길 느티나무 아래 앉아서
동네 어귀도 바라보고
저 멀리 백운산이며 상연대도 바라보시고
힘겹게 오르고 걷고 하셨던
세재 뜰이며 기염나무골 들녘이며 산도 둘러보시고
그렇게 그렇게 다 둘러보시고
평생토록 농사일이며, 자식들 걱정이며
자식들 줄 김장이며, 고추장이며, 청국장이며
이런 걱정들 하지 마시고
이제는 허리도 꼿꼿하게 펴시고
두 다리 아프지 마시고
예쁜 옷 입고 예쁜 신발 신고
잘 생긴 아버지한테 시집올 때처럼
곱디고운 얼굴로 마음 편안히 가시리오.
그렇게 가시리오.
-『소소한 일상, 바라보는 시선을 담다』, 2021.
감상 : 시인의 첫 시집엔 시인의 시와 시인이 직접 찍은 사진이 잘 어울려 있지만 도서 등록번호나 시집 뒤의 발문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 시집 발간에 도움을 준 가족 이름이 있고, 가족 찬조 작품도 있다.
시인의 고향은 함양 백전면 동백이다. 얼핏 동백(冬柏)나무가 연상되지만 동백(東伯), 서백(西伯)으로 표시되는 잣나무가 많은 동네였을 것이다. 지금도 동네에 잣나무가 많은지 알 수 없지만 어머니 살던 집엔 기염나무(고욤나무)와 앵두나무가 있었나 보다. 특히 「기염나무」를 읽으면 어머니와 함께 세월을 지나온 기염나무에 대한 시인의 정이 유난히 애틋한 것을 알 수 있다. 병으로 집을 비운 어머니 대신 집주인 노릇을 하던 나무인데 누군가의 실수로 몸통이 잘린 채 수명을 다하게 되자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사무치는 존재가 되고 만 것이다.
생과 사로 갈리는 어머니와의 이별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시인은 그 생사 경계에서 얼마간 어머니가 여행하듯 머물기를 소망한다. 어머니의 마지막 여행은 이승의 인연 있는 곳, 마음 가는 곳을 한 번씩 찾아가서 추억을 갈무리하면서 동시에 정리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방, 장독대, 기염나무에 머물던 어머니는 동네로, 더 먼 곳으로 나선다.
어머니가 바라보았다는 백운산 상연대는 신라적 함양 태수로 있었던 최치원이 어머니의 기도처로 만든 곳이란 전설이 있다. 연로한 어머니들이 오르기엔 높은 고지대인 만큼 최치원의 어머니가 실제 다녔을 성싶지는 않다. 근래엔 자동차의 도움으로 못 가는 절이 없다시피 되었으니 상황이 다르겠지만 시인의 어머니는 어쩌면 남편, 어쩌면 어린 자식들을 걷게 해서 상연대까지 오른 젊은 날이 있지 않았을까.
그런 어머니도 저 세상으로 아주 건너가고, “라디오 라면은 / 정말 맛있어”(「라디오」)라고 얘기한 딸은 숙녀가 되어 가고 있다. 이 소소한 일상을 기록으로 남겨두는 건 결코 소소한 일만은 아닐 것이다. 자신에게 의미가 있고, 가족에게 기쁨이 되고, 주변 사람에게 귀한 선물이 되는 이 시집은 손익분기점이란 말이 무색할 만큼 남는 장사란 생각이 든다. 일부 독자에겐 서점에서 구할 수 없다는 게 불만이긴 하겠다. (이동훈)